사랑은 이별을 하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사랑의 기쁨은 둘이 나눌 수 있지만, 이별의 고통은 각자 넘어야 하는 험악한 산이다. 함께 하는 삶과는 다르게 죽음이 누구에게나 개별적인 것처럼.
군 입대 영장을 받고 며칠 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뜻밖의 이별 통보. 멍하니 듣던 나는 그만 천지가 무너졌다. 아직도 온 마음이 그녀를 찾고 있는데 틈도 주지 않고 떠난 박절한 뒷모습. 불면의 밤은 날카로운 비수로 나를 난도질하고, 끝내 이기지 못한 허기虛飢에 물 만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으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숨었던 그리움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저몄다. 세월은 나를 얼마나 도와줄 수 있을까? 정지된 듯 꼼짝도 하지 않는 시간에 나를 그냥 던져두었다.
대학 1학년 사월. 첫 미팅에서 만난 그녀는 눈부심 그 자체였다. 하얀 얼굴에 매초롬한 이목구비. 무엇보다도 가지런한 이는 웃을 때마다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불문학이라는 전공까지도 왜 그래 좋던지. 그날부터 그녀는 내게 여지없이 찬란한 별이 되었다.
전생 어디쯤이었을까? 그 인연이 습기習氣로 남아 이렇듯 몸 달게 하는 거라고 내 상상은 하루하루 숙명宿命으로까지 내달았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던 그녀. 붉은 덩굴장미가 줄지어 피어있던 도서관 옆 벤치. 저쪽에서 걸어오는 그녀는 하얀 햇살처럼 잘게 부서지며 내 속으로 들어왔다. 마른 침만 삼키던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만 15개월, 우리의 사랑은 탱글탱글 영글어 갔다.
사랑은 출구를 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입구만 찾아 들면 누구도 걷잡을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그 시절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를 통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녀는 한사람이었지만 내게 그녀는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백 퍼센트 순수와 충만한 열정으로 사랑에 몰입했다.
하지만 사랑은 늪이었다. 빠지면 황홀과 함께 고통도 손잡고 오는 수렁이었다.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을 때 나는 한 번도 고뇌에 찬 아침을 맞거나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사랑에 빠진 후로 내 삶은 상실과 혼란 그리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망의 연속이었다. 신은 사랑을 이용해 천국 한가운데 지옥을 숨겨 놓은 것은 아닌지.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랑이 필요했고, 그 끝없는 갈망은 가슴을 자주 텅 빈 정거장으로 만들었다. 또 작은 몸짓까지도 같아지고 싶은 욕망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과 희망 사이를 날아다녔다. 영혼까지 함께 녹여 하나가 되고 싶은 철없는 목마름은 두 사람 모두를 끊임없이 지치게 했다.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듯이 사랑엔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의 이별 통보는 내 마음에 불도장을 찍었다. 사랑한다고 수만 번 말을 해도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끝나는 게 사랑이고, 죽고 못 사는 애인이나 무찔러야 할 적敵은 어쩌면 같은 말의 다른 표현임을 그때 깨달았다.
사랑 때문에 가슴 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잊으라'는 조언처럼 쓸데없는 것이 또 있을까? 헤어짐이 아픈 것은 이별을 해도 사랑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했던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내 안에 남아 가끔씩 아문 상처를 건드리고 또 어쩌다 한 번씩은 나를 그리움의 벼랑으로 내 모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의 흔적은 한 번 들면 빠지지 않는 옷감 위의 감물처럼 평생 달래며 안고 가야 할 기억의 부스럼인 것이다.
이젠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잊을 줄 알았던 사랑이 아픔처럼 문득 내게 다가설 때가 있다. 그건 어느 누구도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일 게다. 마치 비바람에 씻겨 나무뿌리가 지층으로 드러나듯이 한때의 고통과 분노, 오해와 질투 그리고 미처 익지 못한 생각 탓으로 결국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 새삼 회한悔恨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미해진 기억들 속에 살을 발라 낸 생선가시처럼 유독 내가 잘못했던 일만 또렷이 생각나 시간을 뛰어넘어 힘들게 할 때가 있다. 이젠 무뎌졌겠지 싶어 벗겨 본 상처는 붓기가 아직 여전하고 금방 선홍색 핏물이 배어 나온다. 인연의 끝이 늘 이렇게 허망한 줄은 알지만 편도선 부은 목에 침 삼키듯 아직도 묵묵히 아픔을 참으며 넘겨야 할 때가 있다.
첫사랑! 아름다움의 한 절정, 그러나 낙엽 지는 가을과 닮은 나이가 되고서도 회고해 보면 여전히 간절해서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