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의 값어치 / 조원진 

 

대학에 합격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선불로 받은 월급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는데, 그 돈을 받은 주말에 나는 단골 카페로 향했다. 때가 타도 멋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는 동銅으로 만든 드립 주전자를 추천받았고, 가장 필요한 도구 몇 개를 골랐다. 조금 비쌌지만, 언젠간 보물이 되겠거니 하며 덜컥 사버렸다. 이제 집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설렘과 쓸데없는 데에 돈을 썼다고 어머니께 혼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뒤엉켰던 그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부푼 마음으로 내렸던 커피 한 잔이, 언제 마셔도 맛있었던 그 카페의 커피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던 것도.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커피를 내렸고, 동네 친구를 불러다가 커피를 나눠주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실력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둘이 앉아 커피를 마실 때면 나는 그날의 날씨와 기분부터 시작해 커피의 상태, 물의 온도, 내리는 과정을 기록한 노트를 작성했다. 친구는 그 커피에 대한 한 줄 평으로 커피값을 대신하곤 했다. '브라질 광부의 땀방울' '어린아이의 몽당연필' '초원을 달리는 소녀의 치맛자락' 어이가 없다며 둘이 웃어넘겼던 표현들이었지만, 가끔 노트를 열어볼 때면 그 한 줄 평들 덕분에 그때 마셨던 커피 맛이 기억난다.

직접 커피를 내려 먹는 일이 익숙해지자, 홈 로스팅에도 도전했다. 직접 볶은 커피가 많아지자 캠퍼스에 노점을 열어 커피를 팔았다. 대학원생이나 교수님에게 원두를 팔아 용돈벌이도 했다. 그중에도 지도 교수님은 내 커피를 꾸준히 사주시는 단골손님이었다. 교수님은 졸업논문 심사를 하면서 "대학원을 생각하고 있다"는 나의 입을 막으며 "천만 원 줄 테니 카페 열어" 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에는 "이제는 네 커피를 못 마시는 거냐"며 커피를 한 박스나 주문하기도 하셨다. 취업 준비보다는 시답잖은 커피팔이에 시간을 낭비했던 시절이지만, 커피로 인해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 마음만은 풍족했다.

학사장교를 택해 40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한 이유도 커피 때문이었다. 매일 내려 마시는 커피가 없는 세상을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기에 병사보다 비교적 개인 공간이 보장되고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장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긴 복무 기간 동안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일어나자마자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그 순간은 고단한 날들을 버티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물론 그렇게 내린 커피가 온전히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향이 남다르다며 매일같이 쫓아와 커피를 나눠 마시는 부사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 중위님, 커피에서 오렌지 맛이 나는데요" "오늘 커피 맛있네요. 제 보온병에 많이 따라가도 될까요?" "오늘은 커피가 좀 이상하네, 생선 비린내가 나요" 망중한을 즐기며 나눴던 그 커피 앞에선 계급장도 없었고, 복잡한 생각도 없었다. 그날의 커피에 대한 짤막한 담소들은 군 생활에서 손에 꼽는 좋은 추억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동호회 형​·누나들을 따라 지금은 문을 닫은 이대 앞 커피 전문점 '비미남경'에서 커피를 마셨으니 햇수로는 12년이다. 꾸준하게 마셔댄 커피 덕분에 단골로 찾아가는 가게의 바리스타들과 매장을 마감하고 술 한잔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 대화와 관찰의 기록이 온라인이나 잡지에 연재되거나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카페를 찾아다니고, 커피를 마시고, 바리스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는 일은 그렇게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나누는 얘기는 즐겁지만,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도 좋지만,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기에 자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그릇을 비우고 나면 자리를 비켜줘야 하니 긴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하지만 커피는 취하지도 않고 오래 즐겨도 부담이 없다. 한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 우연히 만난 내 책의 독자가 "어쩌다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커피와 함께했던 좋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로 대답을 갈음했다. 내가 마신 커피의 역사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에게 커피는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는 일은 바쁘고 녹록지 않지만, 힘든 순간에 함께한 커피 한 잔은 언제나 온전하게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커피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와 기쁨을 생각하면 한 잔의 값어치는 늘 부족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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