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이야기 / 이현영
국수 먹고 싶으면 꼭 가는 식당이 있다. 삼천 원이라 싸서 가고 맛이 좋아서 간다. 하대동 우리 동네도 아니고 옆 동네도 아니고 옆옆옆 동네보다 먼 상봉동이다. 국숫집은 주택가 사이에 있는데 간판조차 없다.
신발 벗고 들어가 앉은 방에는 이십 년 전에 내다 버렸을 교자상이 초라하게 손님을 맞는다. 낡은 액자 속 어르신이 벽에서 내려다봐서 드러내놓고 흉도 못 본다. 속으로 구시렁대다 국수 한 사발 받아들면 궁색한 교자상도 낡은 액자도 정겹기 그지없게 달라 보인다. 둥글넓적한 그릇에 봉긋 솟은 국수 다발을 마주하면 흐뭇하다. 국수를 덮은 깨소금에 진한 멸치육수 냄새가 더해져 식욕을 돋운다. 남자 손님은 더 많이 준다. 나와 남편이 가면 국수 둘이 아니고 남자 하나 여자 하나라고 주문해야 한다. 남녀차별이 싫지 않은 국숫집이다.
점심 무렵 가면 줄을 서기 십상이다. 테이블 하나에 모르는 사람들이 섞이는 게 자연스럽다. 후루룩 젓가락질 몇 번이면 될 테니 내외할 까닭이 없다. 홀로 기다리는 배고픈 손님들은 사이사이 자리가 비면 용케 알고 잽싸게 앉는다. 기다리는 줄은 국수 면발처럼 늘어서 있다. 들고나기가 늦은 점심까지 이어진다. 오후가 되기 전부터 보는 흔한 풍경이다.
언제 가도 정답게 인사해주는 국숫집 주인 할머니. 남편은 국물이 짜다고 늘 물 반 컵을 붓는다. 한번은, 국물이 좀 짜다고 계산을 하며 말했더니 다음에 갔을 때 오늘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음식 맛을 평한 손님을 알아봤다. 고작 삼천 원짜리인데 뭘 더 바라냐, 무시할 법도 한데 맘에 담아두었을까.
국숫집 메뉴는 물국수 하나다. 비빔국수도 없고 냉국수도 없다. 다른 국숫집에서 볼 수 있는 김밥이나 돈가스도 없다. 날마다 육수만 끓이고 고명으로 올릴 나물만 만든다. 손님도 물국수만 먹을 요량으로 간다. 주인은 무엇을 먹겠나 묻지 않고 앉은 사람은 메뉴를 고르느라 머뭇거리지 않는다.
나박나박 쓴 무김치와 풋고추가 반찬으로 나온다. 물국수와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그 맛이 떠올라 불현듯 입에 침이 고인다. 무김치는 맘대로 덜어 먹으라고 앙증맞은 옹기항아리가 테이블마다 앉았다. 풋고추도 달라 하면 더 준다. 사리도 더 준다. 더 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국숫집을 알기에 우리도 더 자주 가는데 주저함이 없다.
국숫집에 채소를 납품하는 데가 아는 가게이다. 국숫집 주인은 싱싱한 채소만 주문한단다. 싱싱하면 제일 값이 나갈 터인데 응당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도리쯤으로 알고 있는달까. 그러면서 매번 시들한 채소만 헐값에 가져가는 식당도 있다고 귀띔해 준다. 시들한 식당이 어디냐 묻지 않았지만 국숫집은 계속 가야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몇 년 전 봉사활동을 마치고 무리 지어 국숫집을 간 적이 있다. 계산을 내가 했다. 삼만 육천 원을 내고 크게 한턱낸 사람처럼 인사를 받았다.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나온 표정들은 비싼 고기 먹은 얼굴과 얼추 같았다. 주머니 사정 염려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하다. 배춧잎 한 장으로 세 사람이 먹고 천 원이나 남으니 얼마나 좋은가.
둘러보면 이런 국숫집만 있을까. 누구나 자기가 단골로 가는 푸지고 맛난 식당을 알고 있으리라. 우리는 자주 이사하는 바람에 단골 식당들을 남겨두고 와야만 했다. 그때 식당들이 그리우면 오랜 동무 부르듯 식당 이름을 불러보는 무용한 놀이를 한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맛나고 양이 후한 식당들은 주인의 품성과 비례하는 듯싶다. 그들의 후덕한 마음 씀씀이와 그들이 내놓은 음식은 묘하게 닮았다. 배고파서 들어온 손님이 돈이 궁할지라도 제대로 먹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게 아닐까.
십여 년 전 시골에 살면서 날마다 도(道)를 넘어 일을 나간 적이 있다. 집에서 사십 분 넘게 떨어진 일터는 말씨부터가 달라서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낯선 느낌이었다. 점심값을 아껴볼 요량으로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그날은 바빴는지 챙기지 못했다. 오전 내내 집집을 다니다가 밥때가 되었다. 몹시 시장했으나 선뜻 번듯한 식당에 들어가기엔 돈이 아까웠다.
점심이야 점만 찍으면 된다고 여겨 김밥집에 들어가 한 줄을 주문했다. 김밥을 막 싸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오백 원을 더 줄 테니 좀 넉넉한 김밥을 부탁했다. 과연 여느 김밥보다 내 김밥은 퉁퉁했다. 오백 원을 더한 값을 내밀었다. 주인은 원래 값으로 쳐주었다. 나는 그럴 순 없다고 극구 돈을 내밀었지만, 주인은 냉정하리만큼 단칼에 거절했다. 졸지에 입 한번 잘 놀려 같은 값에 배가 웃을 만치 먹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고봉밥을 퍼주고 값은 똑같이 받았다. 셈이 밝지 않는 주인이었다. 온기를 품은 김밥은 배가 부를수록 가게 주인에게 향한 고마움이 부풀어 갔다. 아직도 김밥집을 지나면 값을 덜 치른 그때 김밥이 떠오른다. 그 시절, 아침에 나와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들어가는 형편이었다. 삼 남매가 알아서 저녁을 먹고 알아서 숙제하고 어쩌면 알아서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퍽퍽한 나날이었다. 식구들 배를 채우기 위해 일을 했으나 종종 나는 주린 배로 귀가하기 일쑤였다. 그날은 푸지게 먹은 김밥 한 줄로 저녁까지 허기지지 않았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고 했다.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가난을 가뿐히 제쳐버리는 식당 주인들이 존경스럽다. 그들은 동네를 지키는 삼천 원짜리 나라님이다. 맛을 제대로 낼 줄 아는 그들은 양을 줄이거나 가격을 올릴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배춧잎 하나 펄럭이며 양옆 친구와 팔짱 끼고 으스대며 갈 수 없다. 그들의 이익만 생각했다면 메뉴판 첫 숫자는 물가인상에 따라 3에서 4로 5로 급기야 6으로 7로 바뀌어서 나를 슬프게 했겠지.
코로나가 끝나고 간 국숫집 벽에는 천원 올라 ‘물국수 사천 원’이라고 붙어있다. 숫자 하나 고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몇 년을 게으름 피워 이제 천원이 올랐을까. 쓰다 보니 국수 생각이 간절해진다. 몸이 나른해지니 남이 해준 한 그릇이 그립다. 배춧잎 꼬깃꼬깃 휴대폰 지갑에 꿍쳐둔 걸 펼쳐 볼까 한다. 나라님 평안하신지 문안도 여쭙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