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시기 / 정성화

 

 

 

길을 가다가 키가 아담하고 머리를 짧게 자른 어르신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살아계셨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런 날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갱시기’다. 아버지가 즐겨 드셨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잡숫고 싶어 했던 음식이다.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전쟁 중의 어느 날, 식수를 얻으러 민가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집 안주인이 한 그릇 먹고 가라며 내어준 음식이 갱시기였다. 그날 얼마나 맛있게 드셨던지 평생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갱시기는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멸치 육수에다 김치와 찬밥을 넣고 푹 끊인 것으로, 국보다는 걸쭉하고 죽보다는 묽다. 우리나라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의 경계에서 생겨난 음식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상품화되지 못해서 이 음식을 파는 식당은 아직 못 봤다.

죽을 끓일 때는 쌀을 넣지만 갱시기에는 대개 찬밥을 넣는다. 찬밥은 한풀 꺾인 식재료다.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김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이 멸치 육수의 따뜻한 품에서 어우러지고 나면 맛이 확 살아난다. 여기에 콩나물이나 국수, 수제비, 가래떡 썬 것을 추가하는데, 형편이 나은 집에서는 국수 대신 라면을 넣었다. 어떤 부재료가 들어와도 다 받아들이는 갱시기는 ‘포용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종종 “오늘 저녁은 갱시기로 때워야겠다.”며 부엌으로 가셨다, 구멍 난 양말에 자투리 천을 덧대어 꿰맬 때나 쓰는 ‘때운다’라는 말이 끼니에 쓰이면 서글프다. 밥은 충분치 않고 찬거리도 마땅치 않을 때 이걸 한 솥 끓이면 여덟 식구의 한 끼가 때워졌다.

어머니가 펴놓은 두레밥상에 앉아 우리는 더운 김이 나는 갱시기를 먹었다. 방아개비가 절을 하듯 우리 앞에 놓인 갱시기 사발에 절을 해가며 먹었다. 이런 건 먹기 싫다고, 콩나물에서 비린내가 난다며 동생이 투덜대었을 때 나는 밥상 밑으로 동생 다리를 꼬집었다.

갱시기를 먹은 날은 자기 전에 늘 배가 고팠다. 나는 이부자리에 누워 먹고 싶은 것들을 떠올렸다. 하얀 쌀밥에 소고깃국, 따뜻한 밥에 얹은 분홍 소시지, 사촌언니 결혼식에 가서 처음으로 먹어본 갈비탕 등. 이런 음식을 마음껏 먹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른들은 아무리 가정환경이 어렵더라도 본인이 잘 헤쳐 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그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엔 한계가 있다. 내 친구들이 공부 때문에 고민할 때 나는 우리 집 형편이 더 나빠질까 봐 걱정했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둡다 싶으면 또 무슨 일인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이란 동요가 있다.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새들이 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무겁지 않아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철이 들게 된 계기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봄 소풍을 갔던 날, 저 혼자 뚝 떨어져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친구에게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 애는 얼른 도시락 뚜껑을 덮었지만 나는 이미 보았다. 거뭇한 보리밥에 풋고추와 된장 한 덩이가 다였다. 평소에 그 애는 점심을 싸 오지 않았다. 점심밥을 먹으면 잠이 와서 오후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친구의 도시락을 본 뒤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그대로 참고 견디기로 마음먹었다.

간식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세끼 밥만 먹었다. 그래서 하루 중 가장 반가운 소리는 ‘밥 먹어라’였고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상에 수저 놓는 소리’였다. 어쩌면 음식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위안거리가 아닌가 싶다. ‘식구’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식구(食口), 이 말에는 온기가 있다. 서로의 끼니를 챙기려는 마음이 그 말을 덥힌다.

식구의 이미지는 ‘갱시기’와 닮은 데가 있다. 서로 섞이고, 스며들고, 받아들이고, 한데 물러진다는 점에서다. 평생 먹고 싶지 않을 것 같던 그 음식이 부쩍 생각난다.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갱시기를 드시던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다시 앉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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