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그린 추상화 / 려원
눈앞에 거대한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가 펼쳐져 있다. 레드와 오렌지가 뒤섞인 무제 無題다. 하루 종일 달궈진 해가 서서히 바닷물 속으로 몸을 담근다. 뜨거운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지면 바다는 열기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알을 삼키기 직전, 바다는 혀가 엘까 잠시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의 순간,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바다는 오렌지가 뒤섞인 레드로, 레드가 뒤섞인 오렌지빛으로 타오른다. 불의 알이 아주 작은 공처럼 보일 때쯤이면 바다는 비로소 긴 혀를 내밀어 휘감는다. 적당히 말랑말랑한 불의 알을 삼킨 바다는 붉게 타오르고 밤이 깊도록 뜨거움을 기억한다. 검푸른 어둠이 끝없이 물결을 타고 밀려오고 밀려갈 때 바다는 잠들지 않고 소리로 존재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암흑 속, 불의 알을 품은 바다에는 밤새 불씨를 지키는 여인이 산다.
출항하는 통통배도 관광객도 뜸한 바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잴 수 없는 바다의 시간 앞에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그림 속 수도승처럼 서 있다. 고뇌, 사유, 번민, 이상, 두려움, 불안이라는 활자들이 모래밭 위로 뿌려지고 도요새 몇 마리가 활자들을 생각 없이 삼킨다. 이른 새벽, 고요 속에 은밀한 소란을 품고 있는 바다는 빨간 것들을 끌어모아 다시 둥글게 빚어내었다. 바다가 불의 알을 뱉어내는 순간 공처럼 하늘을 향해 튀어 올라 바다와 하늘의 접점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충만한 발광, 규정할 수 없는 숭고가 밀려오는 바다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바다의 빛깔과 표정을 살핀다. 바다의 색은 바다가 받아들이는 모든 것의 색이다. 어쩌면 받아들이는 것이 많아서 바다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바다는 검고, 정오의 바다는 진초록, 해 질 무렵 바다는 붉다. 바다의 머리를 타고 쉼 없이 달려오는 포말은 눈부시게 희다. 지난밤 삼킨 뜨거운 해의 족뜰을 수평선 위로 온전히 뱉어낸 바다는 색을 되찾는다. 희망, 가능성, 슬픔, 설렘, 분노, 희열, 인간의 희로애락이 뒤섞여 있기 때문일까? 보는 이에 따라 바다의 표정도 달라 보인다.
삶의 허기가 몰려오고 마음이 끝없이 침몰하는 날, 나였던 그 아이를 찾고 싶은 날, 함께 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날은 발걸음이 먼저 바다로 향한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요동 벌판을 ‘소리 내어 울기 좋은 곳’ 호곡장好哭場이라 하였듯 바다는 호곡장이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일이 잦아졌다. 내 안에 저장된 눈물의 깊이와 넓이와 두께를 아는 일은 잠복한 슬픔의 깊이와 높이와 두께를 아는 일이다. 파도는 호곡장과 어울리는 리듬을 만들어 내고 해풍은 젖은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억눌린 것들이 계통 없이 발산된다. 눈물의 기원은 바다에 있었다. 끝없이 무언가를 낳아야 했던 잉태의 고통 때문일까. 바다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서늘한 눈물 한 조각이 얼굴에 튄다.
바다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밀려오고 밀려감의 무한 반복, 바다가 그린 만다라에 슬픔의 실타래를 풀어 놓는다. 바다는 닳아버린 가슴을 지닌 조약돌, 박제된 불가사리의 꿈, 바닷소리를 모아둔 소라껍데기, 긴 머리를 풀어 헤친 해초를 끝없이 밀고 오고, 찌그러진 페트병, 깨진 유리 조각, 부서진 안경테, 마스크, 수영모, 본래 바다의 것이 아닌 것들을 되돌려 주러 온다. 소라껍데기에 귀를 대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달려오는 넵투누스의 말발굽 소리, 선캄브리아기 해저를 유영했던 피카이아의 노래, 원시 바다의 웅숭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광대한 바다 도감을 더듬는 영원한 학생인 우리에게 심해 어딘가에 살고 있을 생명체들의 경이로운 숨소리를 들려준다.
바다가 다시 불의 알을 삼키려 한다. 검고 긴 혀를 내밀어 뜨거운 불의 알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은 늘 반복되는 바다의 퇴근 시간이다. 눈 앞에 펼쳐진 숭고, 타오르는 충만, 오직 해를 삼킨 바다와 해를 뱉어내는 바다와 눈물의 기원인 바다와 아직 알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이 사는 성소로서의 바다만이 있을 뿐이다. 모태의 바다를 떠난 뒤 사람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바다로 달려가고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인가. 누대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눈물의 기원을 더듬고, 두 귀는 여전히 소라껍데기의 바다를 그리워하며, 마음의 뿌리는 원시 바다 어딘가를 향해 달린다.
바다는 붓을 꺼내어 이글거리는 화폭 위로 무언가 그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마크 로코의 추상화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색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움직임과 경계의 사라짐을 깨닫게 되고 내면으로부터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고 한다. 바다가 그린 추상화, 가공되지 않은 찬란한 날것으로 가득한 캔버스 앞에서 우리는 수도승이 되었다가 철학자가 되었다가 바다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가 마침내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이 된다.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 타오를 때와 식어갈 때, 깨어나야 할 때와 잠들어야 할 때, 빛과 어둠의 시간을 깨닫는다.
“내 작품 앞에서 할 일은 침묵하는 일, 귀 기울여 듣는 일 그리고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일입니다.”
어디선가 바다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크 로스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표현주의 추상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