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따라서 / 최지안

 

아직 해가 산을 넘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선다. 어떻게 알고 따라붙은 것인지, 바닥으로 길게 누워 앞장선다.

​빛도 못보고 자란 식물처럼 가늘다. 그림자도 주인을 닮는가. 연하고 긴 목을 바닥에 누이고 가는 팔을 휘두른다. 가는 다리로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누가 밀면 금방이라도 저만치 나가 엎어질 것 같다.

​발꿈치 끝을 물고 허물처럼 붙은 나의 동반자.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눈도 없는 얼굴로 나를 보는 그의 감정은 차가울지 뜨거울지 알 수 없다. 나를 따라다니느라 지쳤을까. 제 맘에 들지 않아 못마땅하지는 않았을까.

​나를 따라다닌 지 꽤 되었다. 휘청거리며 걸음마를 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얇은 발목으로 디딘 지상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날은 진창을, 어떤 날은 자갈길도 걸으며 그림자의 발목도 두꺼워졌으리라. 가슴을 쓸어내린 일도 있었을 것이다. 잘 넘어지던 나 때문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마다 그림자도 같이 놀랐을 것이다. 부실한 나를 따라다니느라 간이 쪼그라들다 말다 하였으리라.

​어쩌면 나보다 더 나를 속속들이 아는 존재가 아닐까. 나로 말한다면, 한 꺼풀 벗기기만 해도 핏줄이 파랗게 드러나는 얇은 영혼일 것이다. 그림자처럼 한줌도 안 되는 질량으로 가벼운. 가령 내 삶을 달아본다면 그림자만큼의 근량이 될까 말이다. 조그만 기척에도 화들짝 놀라고 없는 근심 만들어 끙끙대는 나. 그런 나를 믿지 못해 오늘도 따라다니며 기꺼이 내 발에 자신의 목을 내어주는 것은 아닌지.

​저녁이 곧 당도할 것 같다. 그림자가 옅어지고 길어지는 것을 보니. 저녁의 붉은 이마를 짚으면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노는 아이들 모습이 보일 듯하다. 나도 보인다. 고무줄이며 사방치기를 잘 못해서 깍두기를 했던.

​사방치기를 하면 움찔움찔 그림자도 같이 뛰었으리라. 고무줄놀이를 하면 까만 고무줄 사이로 그림자는 잘도 빠져나갔지만 나는 얼마 하지도 못하고 고무줄에 걸려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곤 했다. 그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는지 커서도 자리를 내주고 밀려날 때가 종종 있다.

그나마 얻은 깍두기도 저녁이면 맥을 못 추고 끝나버렸다. 조금씩 어두워지면 아이들은 골목의 뚫린 대문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림자도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아이들 놀다가 사라진 고요한 골목. 라스트 카니발의 바이올린 선율처럼 조금은 아쉽고 쓸쓸한 저녁이 발밑부터 슬금슬금 스며들면 어둠을 밟고 집으로 갔다. 따르던 그림자 없이 목 뒤로 스며드는 그 느낌은 서늘하고 축축했다. 그림자를 잃는다는 것은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림자를 잃은 사나이를 알고 있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슐레밀. 그림자를 팔고 난 후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임을 깨닫고 이내 후회한다. 그는 다시 그림자를 찾고자 하지만 그림자를 사간 남자는 대신 영혼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영혼을 팔지 않는다. 돈이 나오는 마술주머니도 던져버리고 방랑의 생활을 계속 한다.

​그림자는 어떤 의미일까.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마술주머니가 경제적인 것을 상징한다면 그림자는 물질과는 속성이 다른 무엇을 말한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국적이라든가 인종이라든가 신분, 혹은 정신적, 신체적인 장애가 아닐지. 작가는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수의 구성원이 지닌 그 어떤 것이 없으면 동일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소수에 대하여 말이다.

​융은 자아가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의 정신 요소들 중 하나를 그림자(shadow)로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부정적인 심리이며 동물적 본성을 내포한다. 상황이 좋을 때는 발현되지 않다가 어려운 상황이 되면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정신분석가 로버트 A 존슨도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에서 그림자를 심리의 어두운 측면이라고 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일까. 내 안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무의식. 유년기부터 사춘기와 청년기를 지나 지금의 삶까지 밑바닥에 차례로 가라앉은 상처와 억압. 그것은 그림자처럼 지금도 나를 따라다니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불쑥 콤플렉스나 피해의식으로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죄어야겠지. 나오지 못하도록.

​어떤 사람의 그림자가 생각난다. 덩치가 큰 사람이었는데 이런 말을 했다. 몸집이 큰 사람은 그가 가진 그림자도 크고 깊다고. 많은 인구와 영토가 큰 중국도 다민족 통제로 애를 먹고,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도 인종차별과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은가. 빛을 많이 받는 만큼 그늘도 그에 못지않겠지.

​그런 당연한 말을 왜 했을까. 그 말을 할 때 그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으로 가던 눈빛, 그 너머에 있는 어떤 말을 기다렸지만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과거, 혹은 내면의 그늘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람마다 그런 그늘이 있겠지. 제 그림자만한 크기나 혹은 그보다 더 큰 그늘을 가지고 사는 것이겠지. 나도 내가 질만한 무게의 그늘을 지고 살아왔으니까. 그 그늘이 있어 오늘도 빛을 받아 그림자를 밟으며 서 있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그늘도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었을 터이니.

​산책을 끝내고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선다. 어둠이 들어선 골목 가로등에 그림자도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색깔과 윤곽이 낮보다 부드럽다.

나의 그림자. 아무런 불평 없이 발에 밟히며 내게 붙어살다가 육체가 사라지면 나와 함께 바닥으로 스미겠지.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고, 앞으로도 밝고 환한 곳으로 다녀 보자고 허공을 껴안는다. 그림자도 나를 따라 엉거주춤 양팔을 포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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