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싶지 않은 것들 / 이정림 

 

엊저녁부터 오늘 저녁까지 만 24시간 동안, 내 몸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평소에도 삼시 세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몸이 만 하루를 밥알 하나 구경하지 못했을 테니, 소화기관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부엌 쪽에서 어정거리는 시간을 제일 아깝게 생각하는 사라이다. 그러니 때맞추어 삼시를 차려 먹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챙겨 먹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인도의 간디같이 깡마르거나 해야 제격일 텐데, 나는 모순되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하지 않게 생긴 것은 순전히 내 착한 몸 덕분이다. 주인 잘못 만났다고 덩달아 포기하지 않고, 남산 딸깍발이 아내 어려운 살림 꾸려 가듯 몸속으로 들어오는 그 알량한 것들을 절약하고 아껴 모아 축적한 덕이다.

그것이 상은 못 줄망정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도 나는 이 지경으로 만든 몸을 나무라고 싶지 않다. 저도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 테니까. 내가 저를 잘 돌보았더라면 그렇게 알아서 제 마음대로 쓸데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살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제 그토록 혼자 애쓴 몸에게 휴식을 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동안 살아 내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던가. "모든 약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휴식과 단식"이라는 말도 있으니….

"단식은 메스를 사용하지 않는 하나의 내장 수술"이라는 문구는 얼마나 유혹적인 말인가. 그래, 단식을 하자. 석가모니도 오체五體의 어딘가가 아프면 먼저 식음을 끊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만일 단식을 함으로써 해탈이 가능하다면 산야에서 굶주리는 짐승들은 모두 해탈하였을 것"이라 하며, 당시 극단에 빠졌던 브라만교의 미신적인 고행 단식을 꾸짖었다고 한다(《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나는 붓다께서 염려하시는 해탈과는 거리가 먼 속인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딱 두 번만 단식하기로 했다. 원래 인간은 스스로 질병을 치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니, 단식을 통하여 몸속에 쌓여 있는 독소와 노폐물을 제거하리라 마음먹었다. 단식은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듯, 몸을 동면冬眠 속에 잠기게 하여 모든 기관을 재정비해 준다고 한다. 컴퓨터로 말한다는 초기화한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끈기였다. 사람이 되기 위한 시련에 호족虎族 여인은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실패했으나 웅족熊足 여인은 성공하여 단군의 어머니가 되지 않았던가. 단군신화는 인간의 체질 개선과 인격 완성을 위한 단식 고행에 있어 최초의 기록이라는 설도 있으니, 단군의 후손인 내가 그걸 못하랴 싶었다.

지금 나는 24시간의 공복 상태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다. 몸속의 모든 기관들에게 휴식을 주니, 우선 몸과 마음이 편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움직이던 위가胃家들도 아마 마음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 휴식이 이렇게 사람을 여유롭게 하는 줄 알았더라면, 좀 설렁설렁 살 것을 하는 후회마저 일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몸과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무언가 좀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기 정신적인 허기까지 몰고 왔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기고 나니, 몸도 마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또 시간이 지날수록 몸속에 맑은 수액만 도는 겨울나무가 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양하가 그랬듯이, 나도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 될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정말 쉰다는 것은 비운다는 말과 통하는 것일까. 그래서 단식을 비움의 미학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육체를 비우고 있다. 그런데 덩달아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서 비움의 미학과는 반대로 내가 비우고 싶지 않은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겐 오래된 전화번호부가 있다. 젊었을 때는 정초가 되면 그것을 새것에 옮겨 적으며, 지울 사람의 이름과 새로 적어 넣을 사람의 이름을 가려 놓곤 했었다. 그러나 게으름에 밀려​ 언제부터 그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 낡은 전화번호부를 무슨 고서인 양 펼쳐볼 때면, 거기에는 지금은 소원해진 사람의 이름도 들어 있고, 세상을 떠난 사람의 전화번호도 있다. 지우지 못한 이름들이 나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세밑이 되면 나는 연하장을 보낼 분들의 이름을 적는다. 한 번 고마웠던 분은 내겐 영원히 고마운 분들이어서 일 년에 한 번이나마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연하장을 받으실 분들의 수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분은 작고하시고, 어느 분은 노환으로 세상사에 얽힌 기억들을 놓아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 새해 아침을 그분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한없이 마음을 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게는 육필로 쓴 문인들의 서신을 모아 놓은 상자가 있다. 그 상자를 열어보면 지금은 안 계신 분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종서縱書로 쓴 봉함 편지의 겉봉만 보아도 누구의 서신인지 금방 알 수가 있을 정도로 친숙한 서체가 반갑다. 문단의 어른들에게 굄을 받았던 그 시절은 내게는 다시 올 수 없는 젊은 날들이었기에 더욱 그리움으로 추억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

잊어야 할 것은 미련 없이 잊어야 하고, 놓아줘야 할 것은 선선히 놓아주어야 한다지만, 그리운 이들에 대한 이런 만남의 기억들은 비워 내고 싶지 않다. 몸이 가벼워질수록 지난날의 기억이 생생해지는 이 명징明澄은 단식이 내게 준 뜻밖의 선물이다. ​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