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 생김새가 특이하다. 빛깔도 낯설다. 관상용이 아닌데도, 마치 호리병처럼 길쭉한 형상에도 아직 풋기가 덜 가신 것같이 거죽이 푸르스름하다. 식용 박이라면 으레 풍만한 여인의 엉덩이처럼 둥글넓적한 데다 표면이 맥옥 같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박 같지가 않아 보인다.
추석 차례상을 마련하려는 아내 따라 재래시장 장보기에 나섰다. 너도나도 마트를 선호하는 추세이다 보니 단대목임에도 분위기가 영 썰렁하다. 호주머니 속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마저 덩달아 허전해진다.
장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제수용품을 얼추 사서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모퉁이 난전에 쪼그리고 앉아 박을 팔고 있는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가져온 것들이 죄 주인을 찾아갔는지 달랑 한 덩이만 남아 마지막 임자를 기다리고 있다.
박을 대하는 순간, 불현듯 살아생전 늘 박을 넣어서 탕국을 끓이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모양새며 빛깔로는 썩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그래도 탕국에 넣어 놓으면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질 듯싶었다. 그런 당신의 지난날이 그리워져서 은근히 아내의 의중을 떠본다.
"여보, 이 박 이거 우리가 떨이해 가면 안 될까요?"
떨떠름해 하는 아내의 표정이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일이 틀어져 버릴 것 같은 낌새를 읽은 할머니가 내 말에 추임새를 넣는다.
"새댁, 탕국에는 박이 들어가야 국물 맛이 시원하지. 생긴 거는 이래도 맛은 그만인 기라. 다들 믿고 사 갔어."
할머니의 모습이며 몸차림 따위로 미루어 절대 거짓말을 할 위인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내는 결국 청을 못 이긴 듯이 할머니 손에 삼천 원을 건네고 박을 넘겨받았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와서 벌어지고 말았다. 아내가 탕국을 끓이기 위해 가운뎃 부분을 동강 내는 순간, 아뿔싸 속이 폭삭 썩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봐요. 왠지 박 같지가 않아서 사지 말자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지." 아내의 볼멘소리가 메아리 되어 흩어진다.
"어리숭한 게 당수 팔 단이라더니 그 할머니, 행색은 순박해 보여도 여간내기가 아니었어." 나도 한마디 보탠다.
잠시 후, 말을 뱉어놓고 보니 표현이 너무 심했나 싶어 이내 후회의 마음이 들었다. 그 할머니인들 박 속을 들여다보았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런 할머니에게 몹쓸 소리를 입에 담다니….
쪼개져 나동그라진 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흥부전의 흥부 놀부 이야기에 생각이 미친다. 흥부가 처음부터 박 속에 금은보화들이 가득 들어 있었을 줄 어찌 알았을까. 그저 욕심 없이 주린 배나 채울 마음으로 가른 박이 그처럼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 것이 아닌가.
그건 놀부도 마찬가지일 게다. 놀부인들 멀쩡한 박 속에 똥물이 꽉 차 있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시안을 가지지 못한 이상 내부의 상황을 알아낼 재간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저 마음을 바르게 쓰면 복을 받고 마음을 나쁘게 먹으면 재앙을 당한다는 권선징악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고작 단돈 삼천 원에 할머니를 완전히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운 나의 찌질맞은 됨됨이가 부끄럽다. 악구중죄惡口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 입으로 지은 중한 죄를 참회하는 심정으로 천수경 구절을 되뇐다.
비단 입으로 지은 죄만도 아니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죄 가운데 마음으로 짓는 죄가 가장 크다고 했던가. '저런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겉으론 어리숭한 체해도 속으로 호박씨는 다 까고 있어' 시장판의 노전 할머니들을 도매금으로 넘긴 못난 마음자리를 뉘우친다.
그렇다고 기분이 완전히 개운해진 것은 아니다. 내내 찜찜한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할머니를 만나 문제의 박이 어떤 경로로 시장 구경을 하게 된 것인지 내막을 한번 물어나 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이따금 시장에 갈 때면 그 할머니가 나오지 않았나 싶어 박을 샀던 자리를 기웃거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