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놈 / 장석창

 

 

그것은 흡사 월남전(越南戰) 같았다. 어느 소설가가 명명한 대로 지저분한 전쟁(Dirty War)이었다. 마지막 결전을 치른 노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격전이었다.

 

“원장님, 저와 동문이시네요. 저는 행정학과 67학번입니다.”

노인은 선배 의사 소개로 내원한 환자다. 풍채에서 오뉴월 석류꽃 같은 원숙함이 흘러나왔다. 대기실에서 내 프로필을 확인한 듯 기꺼운 표정이었다. 선배 의사와 고교 동기라고 했다. 노인이 가져온 CT 사진을 살폈다. 방광 점막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암(癌), 저 사악한 혹덩이,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법칙에 반하여 무한증식하는 변이체, 반면 숙주의 삶은 유한한 틀에 가두어 버리는 이율배반적인 세포의 응집물. 노인은 방광암과 전쟁을 시작한 노병(老兵)이었다.

노인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 병장이다. 해방 후 태어나 동란 중에 유아기를 보냈던 세대다. 그 시대를 겪었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노인은 한을 품고 살았다. 부친은 육이오 전몰용사 김 병장이다. 편모슬하에 아들 형제 중 장남인 노인의 삶은 곤곤했다. 학과 성적은 우수했다. 지방 명문 고교를 졸업했다. 서울 소재 유명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학비를 벌어야 했다. 월남전에 자원했다. 모친의 눈물을 뒤로하고 월남으로 떠났다.

노인은 밥 딜런(Bob Dylon, 1941~)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다. 밥 딜런은 대중음악가 최초로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다. 가사에 담긴 시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의 곡 <Blowing in the wind>(불어오는 바람에)는 월남전 반전 시위현장에서 널리 불렸다.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와야 영원히 그칠까요?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있다오.’

싸늘한 전우의 주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이 노랫말을 응얼거리는 노인을 상상해본다. 노인이 진료실을 떠나면 암 환자들이 가는 여로를 그려보곤 했다.

 

착한 놈, 좋은 놈이 나쁜 놈, 이상한 놈과 벌이는 사투(死鬪)다.

원래 그 나라(인체, 남베트남)에는 착한 놈(정상 세포, 남베트남 국민)이 오장육부(五臟六腑)라는 도시를 이루고 평화롭게 살았다. 그들은 일정한 속도로 자식을 낳고 사멸하며 질서를 유지했다. 각 도시는 기능적으로 특화되었지만, 수로(혈관)와 육로(임파선)를 통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평온하던 도시에 나쁜 놈(암세포, 월맹군)이 출현했다. 처음에는 힘이 약해 보안관(면역세포, 남베트남군)이 쉽게 제압했다. 그 후로도 수시로 나타났지만 살아남은 놈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국가 기강은 느슨해지고 보안관은 태만해졌다. 하루는 나쁜 놈 여럿이 한 도시에 잠입하더니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들은 기존의 규율을 깨뜨리고 기하급수적으로 수를 늘려나갔다. 착한 놈을 밀어낸 자리에는 커다란 나쁜 놈 아지트(암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한술 더 떴다. 옆 마을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보안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보다 못한 좋은 놈(의사, 미군과 한국군)이 나서기 시작했다. 우선 아지트와 주변에 정밀 타격(외과적 수술)을 가했다. 그리고 나쁜 놈이 다시 발호하는지 순찰(추적 검사)을 강화했다. 한동안 나쁜 놈은 자취를 감추었다. 박멸된 듯했다.

착각이었다. 이상한 놈(저분화 암세포, 베트콩)을 간과했다. 그들은 탁월한 위장술을 가졌다. 착한 놈과 섞여 있으면 색출하기 쉽지 않았다. 그들 전술은 정글에서 벌이는 게릴라전이었다. 신출귀몰했다. 일개미가 제굴 드나들 듯, 지하 요새인 구찌터널(점막하 조직)에 은신해 있다가 기습 공격하고 다시 숨어들었다. 곳곳에 부비트랩(암세포 방어막)을 설치하여 좋은 놈 접근을 막았다. 군수 물자(영양분과 산소)는 호찌민 루트(암 신생혈관)를 확장해 끊임없이 공급받았다. 진흙탕 싸움이었다. 좋은 놈은 심리적 공황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사이 이상한 놈은 육로와 수로를 타고 신속히 다른 오장육부로 퍼져나갔다. 이제 각개 전투는 한계에 봉착했다. 새로운 조치가 필요했다. 정글에 네이팜탄(방사선 치료)과 고엽제(항암제)를 마구 쏟아부었다. 온 국토가 초토화됐다. 착한 놈과 좋은 놈의 피해도 상당했다. 그러나 이상한 놈은 이상한 놈이었다.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기가 질린 좋은 놈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 틈에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은 오장육부 전체를 점령해 버렸다. 그 나라는 그렇게 쓰러졌다.

 

노인 이름이 접수창에 뜨면 노인은 무사한 거였다.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노인이 방문하기를 고대했다. 어머니 심정이었다. 노인은 대학병원에서 치료받았지만, 틈틈이 나를 찾아와 경과를 알려 주었다. 내 의견도 구했다.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담당 교수님 말씀대로 치료를 받으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노인은 월남전 무용담을 즐겨 말했다. 암 투병을 참전의 연장선으로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사선을 넘으며 격랑을 헤쳐 온 그 시절은 노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전장을 누비듯 암세포와 싸워나갔다. 살기 위해 죽였고, 죽지 못해 죽였다. 한바탕 소요가 잦아들면 캄캄한 고요가 밀려왔다. 적막 속에서 크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들숨은 생존이었고, 날숨은 안도였다. 전적이 좋지 못해도 굴하지 않았다.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至常事)라며 훌훌 털어냈다. 최후 승리를 염원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노인의 전황은 국지전을 지나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초기에는 내시경 절제술과 국소 면역요법으로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암은 달랐다. 십자포화를 버텨낸 암세포는 더욱 악성화되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창궐했다. 근치적 방광적출술에 이어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까지 받았다. 듬성듬성한 머리숱, 푹 들어간 눈, 노란빛이 감도는 흰자위, 푸석한 피부…. 시한부 삶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뭉클했다. 노인에게 건네던 상투적인 위로도 더는 필요 없었다.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삶을 정리할 여유가 있어서 감사하네요.”

 

우리네 인생 여정은 각기 다른 곡선을 그리지만, 그 끝은 한 점에서 수렴한다. 삶의 개별성은 보편성을 초월할 수 없다. 의사는 종착점으로 다가가는 곡선의 기울기를 완만하게 도와줄 뿐이다. 암 선고를 받으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추상을 구상화한다. 처음에는 이를 부정하고,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남겨질 가족들을 떠올린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변하지만,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명언을 되뇌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진다. 하지만 점점 피폐해 가는 심신을 확인하면서 죽음도 인생의 한 부분임을 자각한다.

나는 노인이 ‘삶을 정리할 여유’에 집착하는 연유를 잘 알지 못한다. 말기 암 환자의 말로를 숱하게 지켜봤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들 머릿속에는 연명과 종결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무수히 교차한다. 그들에게 경황은 없다. 노인이 원하는 삶의 정리란 무엇일까. 그리고 얼마나 더 삶이 주어져야 그 바람이 이루어질까. 그 후에는 삶에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어쩌면 노인은 유언 하나 없이 산화한 한 병사의 허무함이 가슴에 사무쳤는지 모른다. 아니면 영문도 모른 채 횡사한 어느 민간인 아이의 덧없음인지도. 죽더라도 죽음이 지척임을 인지하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도 쳐 보고, 안 되면 차분히 대비하는 죽음이 덜 무상하다고 여긴 건 아닐까. 그것은 의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아름다운 죽음을 원한다. 나에게는 어떤 삶의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을까?

 

노인​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나는 노인에게 발병한 방광암이 고엽제 후유증임을 확신한다. 청년기에 치른 1차 대전의 전흔은 말년에 2차 대전을 일으켰다. 노인은 패했다. 아무도 노인의 죽음을 말기 암 환자에게 예견된 수순이라며 주목하지 않겠지만, 나는 현대사 격동기를 견뎌낸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고단함을 저 노인에게서 본다. 나는 노인 영전에 밥 딜런의 노래 <Knocking on Heavens' door>(천국의 문을 두드려요)를 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엄마, 내 총을 땅에 내려놔 줘요.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쏠 수가 없어요. 길게 깔린 먹구름이 몰려오네요.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느낌이에요. 똑, 똑,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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