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은 간이역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느려질 것 같은 시공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들 사이에 누군가의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글씨다. 채마밭 가장자리에 잡초들 자리 잡은 빈터, 둥지 속의 어린 새들이 먹이를 기다리는 허공이다. 조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빠르게 가는 직선이 아니라 천천히 둘러 가는 곡선이어야 만날 수 있다. 때로는 그리움에 빠지고 멍하니 사색에 잠기는 순간이다.

약속과 약속 사이에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가까운 공원에 차를 세우고 언덕에 올랐다. 시끌벅적한 세상 소음들이 역사의 무게감에 잠시 정지된 듯 주위는 고요하다. 먼 산 뻐꾸기 울음 같은 허공이 빈집으로 남아 하얀 여백을 키우고 있다. 후드득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도 정(靜)의 소리고 몸짓이다. 천천히 가는 것이 멀리 가는 법이라며 귓가를 지나가는 바람의 전언을 듣는다. 턱까지 차올랐던 숨결이 어느새 제 호흡법을 찾아 잘 여문 옥수수처럼 가지런해진다.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먹과녁 같은 초행길 가듯 종종거리며 살아내느라 내 숨결도 마냥 숨비소리 같았다. 인간의 삶은 끝없는 사막의 길을 걸어가는 낙타와 같다. 길에 묶인 생은 차갑고 가파르기만 하다. 죽음이 길을 가로막을 때까지 신기루 같은 삶을 걷고 또 걸어가야만 한다. 채우면 그만두리라 다짐하지만 욕심은 누구에게도 가득 차는 법은 없다. 바쁘지만 왜 바쁜지, 일에 대한 의욕은 넘쳐나지만 무엇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지 오래전에 망각하고 살았다.

정신적 여백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삶이었다. 편리함에 길들어진 현대인의 문명화된 삶은 속도만 강요할 뿐 방향은 상실하고 말았다. 왜 사는지, 무엇으로 행복한지 삶에 대한 물음도, 자신의 존재도 잃어버렸다. 문화보다 문명에만 길들어진 삶은 감사하다는 생각, 미안하다는 표현도 사라지고 사랑과 의리, 낭만 같은 단어들도 고전이 되어버렸다, 산에 가면 새소리, 들에 가면 꽃향기가 있는데도 도외시하고 산다. 주변의 냄새와 소리에 귀를 닫고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에 의존할수록 자꾸만 메말라가는 영혼이 두렵기만 하다.

아버지는 여백이 없는 삶을 살았다. 조실부모한 어린 시절부터 배고픔의 설움과 밥벌이의 수모를 몸소 겪으면서 성장한 탓인지도 모른다. 못 가진 자에게는 노력밖에 없다는 생각에 항상 일에만 전념했다. 자기 자신보다는 주변을 위해서 똑바로 서 있어야만 했던 날들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여유는 사치이자 방종이었다. 여행다운 여행 한번 없이 항상 몸을 움직이고 살아야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임종하는 순간까지도 휴식 없는 삶을 후회하기는커녕 못다 한 일거리를 아쉬워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앞섰다.

어쩌면 여백이란 타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남들의 시선이 아닌 오롯이 내 선택으로 사는 삶, 내가 기쁘고 편안한 삶,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들여야 할 것과 밀어낼 것을 구분해서 사는 주관적인 삶을 말하는 것은 혹여 아닐까 싶다. 겉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 나 자신에 집중하며 사는 삶이다.

무엇보다 나를 비워야겠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대나무가 곧게 자라는 것도, 범종이 멀리 울려 퍼지는 것도, 구들장이 따뜻한 것도, 북소리가 둥둥 우렁찬 것도, 배가 물에 뜨는 것도, 피리가 맑은 소리를 내는 것도, 연탄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제 속을 비웠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일도 삶의 여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고 너그러워져야 삶의 질도 높아지는 길이 될 것 같다.

여백은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있다. 길가의 벤치에도, 한낮의 그늘에도, 창가에 앉아 커피 한잔에도, 여름날 소낙비 소리에도, 골목길 두부 장수 소리에도, 풍성한 한복의 품에도, 좋은 글의 행간에도, 허물없는 사이의 웃음 속에도 있다. 똑똑하고 빈틈없는 사람보다 순하고 그리움이 많은 사람, 흥만 가지고 말만 많은 친구보다 서로 속내를 알고 때로는 무심하고 침묵할 줄 아는 친구가 편한 것도 여백 때문이다.

여백은 삶의 흔적을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 그립고, 인생이 되돌아 손짓할 때 그 여백 속에서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 여백은 어느 순간의 눈물로, 웃음으로, 감동으로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눈빛으로, 친구와의 우정의 목소리로, 여행길에 만나는 별빛이나 바람으로 만들어진다. 내 삶에도 숨구멍 하나 열어두고 살아야겠다.

시간을 잠시 잊어본 게 얼마 만인가. 시간 밖의 시간에 서서 일상이라는 무게를 잠시나마 떨쳐내 본다. ‘속도를 늦추면 세상이 넓어진다.’는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앞뒤도 없이 달려가는 어제와 오늘, 가야만 하는 행간 어디쯤에서 길을 잃을 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백을 한번 찾아 나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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