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샀다 / 강천

 

 

그림자를 샀다. 소유권의 상징인 계약서 따위는 쓰지 않았다. 주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금전이 오가지도 않았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했다. 가장 전통적이고 아름다운 방법, 물물교환이었다.

거래 상대는 삼백 살 어림의 팽나무다. 그가 그림자의 사용권을 내게 주는 대신 무시로 찾아와서 바라봐 주고 말동무가 되어 주기로 했다. 내가 상상하기 힘든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정붙이나 마음 줄 벗 하나 없었겠는가만, 식물의 숲이 사람의 공원으로 변하면서 모두 내쫓겨 버렸다. 키 작고 여린 나무들은 다 베어졌다. 지렁이며 개구리, 여치가 활개 치던 풀밭은 딱딱한 자갈돌로 뒤덮였다. 목마름을 견디며 어떻게든 싹을 틔워 올린 풀들은 잡초라는 이름으로 곧바로 제거당하고 만다. 겨우 살아남은 큰 나무들은 밑동을 그대로 드러낸 채, 멀찍이 서서는 소 닭 보듯 서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다. 상황이 이러니 약간의 불공정을 감수하면서도 이 단독 거래에 응한 것이리라.

뜬금없이 나무 그림자를 사러 갔던 이유는 이런 구절을 만났기 때문이다. 공자가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이 말을 들은 현명한 어부가 선생은 아무런 관직도 지위도 없으면서 분수에 맞지 않게 혼자 온 세상 걱정을 다 하니 근심이 생긴다고 했다.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으니, 어부는 그림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이 싫어서 이것들을 떠나 달아나려 하였다. 그런데 발을 자주 놀릴수록 발자국은 더 많아졌고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더디게 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 빨리, 쉬지도 않고 달리다가 결국 쓰러져 죽고 말았다. 만약 그가 그늘 속에서 가만히 쉬고 있었다면 그림자도 발자국도 생기지 않음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처지가 딱 이랬다. 요즘 들어 더욱 빈번해진 행사들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억지춘향으로 참여는 하지만 다녀와서도 개운하지 못한 앙금이 남는다. 잦은 접촉이 쓸데없는 말을 낳기도 하고, 허물없음이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되기도 했다. 불합리와 부당을 입에 담는 순간 조직의 가시랭이로 변한다.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고 상심이 생겼다. 생각이 생각을 낳았다. 차라리 어부의 말처럼 가만히 쉬면서 나서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심화였다. 전부 오지랖 넓힌 내 그림자였고 내 발자국이었다. 이런 차에 단비 같은 문구를 대면했으니 당장 나무 아래로 달려올밖에.

공원 바닥을 다지면서 훤하게 드러난 뿌리를 내 전용 자리로 정했다. 나무로 보자면 동북쪽이라 정오 무렵부터 내내 그늘이 드리우는 장소다. 둥치가 두어 아름을 훌쩍 넘기는 데다 키도 이십여 미터에 이를 만큼 장대하다 보니 나 하나 정도 보듬기에는 차고 넘친다. 자리로 보자면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

나무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서 호흡을 고른다. 무슨 드높은 경지까지는 아닐지라도 지나온 삶의 성찰과 고요한 사색을 꿈꾸며. 아직은 준비가 덜 된 탓인가. 채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나를 품은 그림자가 변덕을 부린다. 믿음직한 덩치와는 달리 자꾸만 꼼지락댄다. 나무가 잎을 흔들면 그림자는 춤을 춘다. 슬금슬금 옮겨가면서 모양새를 바꾼다. 잠깐씩 햇살에 길을 터주며 집중을 방해한다.

앉아 보니 알겠다. 그림자의 장난질에 덩달아 허둥거리는 내 심지의 얄팍함을. 나무는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이것’이 네 마음의 실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다. 아직은 떼려 하면 할수록 더 진하게 드리워지는 마음의 그림자.

마음이야 이러거나 저러거나 몸은 그림자 안으로 들어와서 멈추었다. 과연, 내 육신의 그림자는 옅어졌고 발자국도 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시끄럽게 들리던 매미 소리에 음률이 실린다. 찌는 듯 짜증스러웠던 공기에 선선함이 묻어온다. 꼬물꼬물 개미들이 무너졌던 흙 탑을 다시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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