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연가 / 허정열

 

커다란 얼굴에 노란 미소가 가득했다. 화단에서 해바라기와 눈 맞춤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십 개의 황금빛 꽃잎과 노란 수술이 씨앗을 호위병처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태양이 내려온 듯 눈이 부셨다. 울울창창 푸른 여름에 돋보이는 해바라기 무리였다. 누군들 해맑은 아름다움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외출 나가는 중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약속 때문에 황급히 자리를 떴지만, 그 여운은 아쉬움 대신, 장기기억 속으로 숨어들었다.

행사장 일을 돕다가 화환에 꽂혀 온 해바라기에 자꾸 마음이 쏠렸다. 여러 꽃과 어울려 있어도 환하게 눈에 띄는 노랑의 유혹. 이미 꺾여 제2의 생이 시작되었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차츰차츰 생명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어졌다. 행사가 끝나고 다른 생화와 함께 해바라기를 한 무더기 뽑아왔다. 설렘은 덤으로 따라오고 기분이 높아져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에 도착해 큰 도자기에 꽂아놓으니 온 집안이 밝아졌다. 오직 꽃으로만 핀 노란색이 더욱 빛을 발했다. 정해진 생명이지만 며칠 동안 내 몸 마디마다 감동을 요동치게 하고 행복감을 전달했다. 하지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아쉽게 이별해야만 했다.

녹색 잎에 둘러싸인 꽃은 얼마나 당차고 야무지게 보이던가. 해바라기의 뜨거운 발화는 여기를 넘어 저기, 너머까지 꿈꾸게 한다. 활짝 핀 꽃은 모든 근심을 털어낸 듯 환하다. 해를 마주한 듯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꽃에서 열매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커다란 꽃송이는 싱싱하던 이파리를 축 늘어뜨리고 열매를 익히느라 안간힘을 쓸 것이다. 바람이 불면 고개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도 하니 안쓰러움을 보탠다. 씨앗을 익히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듯 그의 묵언엔 엄숙함까지 깃들어있다.

향일화, 산자연, 조일화라고 불리기도 하는 해바라기는 내 마음을 훔쳐간 도둑이다. 수정 같은 노랑은 자석처럼 날 끌어당겨 가슴에 불을 질러 반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일년생 초본식물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 ‘태양의 꽃’ 또는 ‘황금꽃’이라고도 불린다. 해를 따라 움직이는 특징을 가진 해바라기는 꽃이 피기 전에는 하늘바라기를 하지만, 꽃이 피고 나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의 독특함이다.

지나가다 해바라기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 맞춤이라도 하게 된다. 수습생이 그린 초상화가 행운을 가져다준 것처럼 해바라기도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희망을 품게 하는 끌림이 있다. 여러 가지 쓰임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처럼 마음을 기울게 하여 내면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킨다.

사람이 사랑을 표현할 때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대답하지 않던가. 나도 ‘그냥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할 것이다. 그냥은 무한대다. 특별한 이유 없이 좋아 어떤 이유보다 많은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있어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처럼. 보풀 거리며 일어나는 생각이 버겁고 힘겨울 때 해바라기꽃을 보면 온몸이 환해지며 따스함으로 채워진다. 어둡던 가슴에 노란 등 하나 켜고 있는 듯 은근하다. 빈틈없이 박힌 까만 씨앗은 어머니의 당부 같아 그리움 곁을 서성이게 한다.

7월에서 9월 넓은 들녘에 피는 해바라기. 최대 2m까지 자라는 키다리에 꽃의 크기가 지름 30센티나 된다. 관상용으로 키우기도 하지만, 본래는 해바라기 씨를 얻기 위해 재배한다. 꽃말은 대표적으로 ‘프라이드’라는 뜻이 있다. 더운 여름에 자존심을 가지고 꿋꿋하게 잘 견디고 버텨내어 화려하고 커다랗게 자란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그런 해바라기를 좋아했다. 난 가끔 밀려오는 기억을 열어 기분전환을 위해 다운 받아놓은 그의 그림을 본다. 고흐의 색다른 붓질은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처럼 내면의 뜨거운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화병에 꽂힌 꽃들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그의 짧고 비극적인 삶과 예술이 스쳐 간다. 이글거리는 태양같이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는 고흐의 그림은 늘 역동성과 함께 새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과학기술 발전사에서 색은 빼놓을 수 없듯이 고흐는 노란색에 희망과 기쁨, 설렘을 담아냈다. 내게도 노랑은 설렘과 기쁨의 색깔이다. 장르는 다르지만,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격정적으로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글을 써 보고 싶다는 갈망을 가져본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수학적으로 노란색의 해바라기가 금전운을 불러온다고 믿어 이사나 경사 때 사진이나 그림을 선물한다. 돈의 색상인 노란색과 비슷하다 하여 돈 들어오는 꽃으로도 인기가 많다. 부귀 화목인 목단과 더불어 해바라기는 생명, 행운을 상징한다. 한방에서는 줄기 속을 약재로 쓰기도 하고, 샴푸와 기름, 꿀 등을 선사한다. 여러 쓰임새를 가진 해바라기는 열정적으로 살다 가신 어머니를 닮았다.

청소년들 사이에선 왕따의 대상이 “예쁘기도 한 것이 공부까지 잘하는 친구”라는 말이 있다. 왕따의 기질을 다 갖춘 해바라기가 꽃들에 왕따 당할 것을 우려해 키를 훌쩍 키운 건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해본다. 청소년들의 기막힌 논리를 내세워 공부로도 미모로도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결핍을 그렇게라도 메우고 싶은 건 아닐까 싶다. 짧은 시간에 온몸을 불태워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해바라기. 몇 배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으로 태어나 난 무엇을 남겨 놓고 훌훌 떠날 수 있을까.

기억은 놀라운 생명력을 가졌다. 현재는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중첩되고, 과거는 현재 속으로 들어와 새하얗게 되살아나게 하나 보다. 화단에서 보았던 오래전 해바라기와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내겐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꽃이다. 기억 속 해바라기 속에 맑고 환하게 웃으시던 엄마의 미소가 걸려 오늘 밤도 뒤척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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