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 정여송

 

 

꽃의 향기는 여하튼 매혹적이다. 그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은 소리 나지 않으나 울림 있는 명문장과 같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듯이 추는 춤이고, 어느 누구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부르는 노래이며,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 같은 사랑이다.

꽃의 자태와 향기는 여인을 연상케 한다. 연하고, 부드럽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기에 '꽃=여자'의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그래서인지 뭇 여인들은 꽃에 비유되는 것을 우쭐한 기쁨으로 여긴다.

가끔 예외를 만난다. 본디 예외는 독특한 존재다. 외톨토리의 슬픔을 독차지하는가 하면 보통을 초월한 깊은 구석을 지니고 있다. 특별한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평범한 무리로부터 따돌림 대상 1호다. 그러나 그것을 서러워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밤느정이에서 예외의 능청스러움을 발견한다. '진심'이란 꽃말과는 유다르게 꽃의 생김새부터 레게머리를 한 청년의 머리채 모양이다. 아니 도가머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향기 또한 여느 꽃들과는 달리 특이한 색조를 띠고 있다. 여자들이 밤느정이에 비유되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연유가 된다.

산골짜기 잔설들이 녹아내리는 소리,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소리, 여인들의 마음이 날아다니는 소리, 봄바람에 실린 그런 소리들이 귓등을 타고 놀 때면, 연초록 잎들이 산날망으로 기어오르고 물푸레나무가 물빛 마음으로 흥얼거린다. 하얀 밤느정이도 예서 제서 피기 시작한다. 점점... 페스티벌이 절정을 향해 무르익어 가고, 초대된 벌떼들의 향연도 펼쳐진다. 뭉뭉한 열기가 틈도 없이 운집해 있다.

밤느정이는 꽃 잔치가 무색하지 않도록 향내를 쉴 새 없이 토해낸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고, 은은할수록 사랑받는다는 정황을 모르나​ 보다. 풍족한 것만이 능사가 아닌데, 넌지시 찔러주는 충고에도 아랑곳 않고 분별없는 저 헤픔을 어찌 막을까. 제 성질이고 제 고집이고 제멋인 것을, 그러나 제멋에의 도취가 남부럽잖은 행복이라 할지라도 가까이하기엔 왠지 거북스러운 강한 냄새는 숨쉬기조차 용천하다. 마치 후손에게 물려주는 미토콘드리아의 DNA처럼 나타나는, 페로몬 향기라고 해야 할까. 남자의 그 냄새와 흡사한 꽃 비린내를 풍겨낸다. 그 특이함과 강렬함은 멀미마저 일으킨다.

오호라! 남성을 상징하는 꽃? 그럴 리가? 아니,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의 나무에서 잎겨드랑이를 통해 피어나는 미상尾狀 꽃차례이고, 소스라칠 일은 이 중 짙은 향기가 수꽃에서 난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낯익었던 현실이 낯설어진다. ​

억지스런 발상이라 해도 좋다. 가끔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얘기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해도 할 수 없다. 가끔은 환상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도 더 사실적일 때가 있다. 말이 된다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해서 나는 밤나무에서 자연의, 자연에 의한 성전환 수술이 자행되고 있다고 감히 상상을 한다.

열광의 축제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밤느정이는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야기와도 같은, 남성적에서 여성적으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천천히, 몇 달 동안 시나브로 진행된다. 그 시술은 은밀한 곳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남성적 밤느정이가 하염없이 지고 또 지면서 포침을 박은 각두로 성을 쌓고, 단단한 갈색​ 껍데기로 담을 치며, 얇은 속껍질로 챙챙 울을 여미는, 여성적 변신에의 혼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여자이고 싶은 그 마음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소망이어라

 

온전한 여인이 되기까지 아무도, 심지어는 하느님도 엿보지 않는다. 시간마저 말없이 잠잠하게 기다린다. 기다림에는 주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만 분의 일이나마 얻을 무엇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허기인지 목마름인지 모를 그 기다림을 가져야 한다.

밤송이는 두어 계절이 지나도록 자연을 따르고 섬긴다. 그리고 '내기'에 생을 바친다. 지독한 뙤약볕의 단근질을 견뎌내기. 심술 고약한 태풍에 맞서 이겨내기. 즙액을 빨아먹는 왕 진딧물, 잎살을 먹는 데 죽​살이치는 깍지벌레,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어스렝이 나방의 헤살을 버텨내기에 목숨을 건다.

그러구러 좁은 각도 속에서 인내와 함께 여물어 가고, 소슬바람이 불면 단정한 제 매무새를 드러낸다. 차오르는 몸을 죄던 철퇴 같은 갑옷을 찢는다. 성곽을 무너뜨린다. 아님 남성적을 완전히 벗어던진다. 굼뜬 듯한 무던함과 진중한 참을성과 절박한 성품이 있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굴속에서 사람 되고자 빌며 기다리며 웅녀가 된 수곰처럼.

딱딱한 밤송이. 그 껍질의 완강함은 융통성이 없어선 줄 알았다.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말하려는 고백인 것을 차마 몰랐다. 아뿔사!​

찢어진 각두를 반쯤 걸치고 드러낸 알밤이 토실하다. 탐스러운 자태에 마음마저 풍성해진다. 고동색 외피에 자르르 흐르는 윤기에서 앞가르마 곱게 빗어 넘긴 여인의 쪽진 머리가 엿보인다. 단정함과 곧은 절개가 섬광처럼 스친다. 조심스럽게 겉피를 벗기자 보늬 차림에서 속치장을 잘한 속곳 바람의 여인이 아름답다. 가슴을 동여맨 속치마의 말기가 얼비친다.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려는 여인의 고고함과 넋이 묻어 있다. 다시 보늬를 벗긴다. 몇 달 동안 하양을 달이고 달인 상앗빛 속살이다. 보는 이의 숨소리를 잦게 하는 서늘하면서도 고결한 백자가 아닌가. 터질 듯이 차오르는 만월이요. 어떤 삿됨도 끼어들 수 없는 꽉 참이다. 절세가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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