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가는 길 / 조낭희

 

 

모처럼 가을 하늘이 넓다. 차창 밖으로는 며칠 전까지 차분하게 내려앉던 가을이 맑은 햇살 사이로 황홀하게 일렁인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바람 한 점 없고, 조지 윈스턴의 단조로우면서도 경쾌한 음률이 조용한 계절을 흔든다.

사전 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몸만 떠난 여행인지라 포항에서 만난 동행인의 친구가 안내를 맡아 주었다. 친구의 집에는 가을 햇살인지 행복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친구의 편안한 미소에서 걸러지지 않은 가을 공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오어사로 향했다. 복잡한 생활 속에서 훌훌 벗어나 은빛 머리칼을 날리는 억새와 파리한 쑥부쟁이를 보며 연신 감탄했다.

넓은 호수를 끼고 작은 다리를 건너서 오어사는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 고승인 원효와 혜공이 수도할 때, 법력으로 개천의 고기를 먹은 후 다시 살려 내자는 내기를 하였다. 그런데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만 살아남게 되자, 서로 내 고기라 하여 오어사(吾魚寺)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절을 감싸는 운제산은 대부분 관목과 활엽수들로 이루어져 있어 어지간히 단풍이 곱다. 작은 바람에 색색깔의 나뭇잎들은 물 위를 떠다니며 가을을 이야기하고, 특히 노란 참나무 숲 아래 대나무들의 몸 비벼대는 소리는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주변의 풍경에 도취된 나를, 동행한 그녀가 탱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흔들어 깨운다. 자연스럽지 못한 채색과 일본 분위기가 느껴지는 가는 얼굴선, 둥근 콧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웅전의 아름다운 사방 연속 연꽃무늬 창살과 작고 빛바랜 목어, 거기에다 c창건설화까지 한몫을 하며 한국적인 즐거움을 안겨주는데 일본풍이라니.

때마침 예불을 올리는 스님의 독경 소리가 냉랭하게 들리는 것은 이런 까닭이리라. 일본식 판자 울타리로 둘러쳐진 오어사는 왠지 세계화에 중심을 잃고 짓눌린 한국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그녀와 나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원효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어사를 건너는 폭 좁은 다리 위에서 문득 물속에 잠겨 있는 동전들에 눈길이 멈췄다. 물속에 던져진 동전들은 나름대로 크고 작은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소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그만한 몫을 버릴 줄도 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던졌을까? 인간의 욕심은 채워도 끝이 없고 비워도 한이 없는 모양이다.

후수 옆 비탈길을 도는 곳에 '인연 따라가는 길' 이란 낡은 나무판이 돌에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 길을 따라 낙엽에 깔린 오솔길이 폭신하게 이어져 있다. 우리는 발자국을 조심스레 옮겨 놓으며 나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진솔하게 마음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인간은 물질적인 면에서든 감정적인 면에서든 만남의 인연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어떤 인연이든 아무런 기쁨 없이 단순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생활은 무미건조해 질 것이다. 사람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이루지 못해서 고민이 많던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인연의 소중함에 미음을 모아본다.

선명한 꽃잎과 가시가 알맞게 어우러진 부겐베리아를 연상시키던 그녀에게 국화 같은 기품과 숨겨진 은은함을 보았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만남의 큰 즐거움이리라.

둘이서 팔짱을 끼고 사이로 드러난 돌 징검다리를 사뿐사뿐 건너뛰며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가슴 넓은 자연이 우리의 인연을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차츰 편안한 벗이 되어 내 안에서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걷는다.

천지가 조용하다. 마른 나뭇잎이 천천히 내 어깨를 스치며 떨어질 때, 중년 남녀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무며 올라온다. 그들은 어떤 인연으로 함께 이 길을 걸을까? 인내와 사랑으로 다져진 원숙한 부부라도 좋고 진심으로 서로를 아껴주는 오래된 친구 사이라도 좋다. 다만 그들의 인연이 서로에게 기쁨과 충만함으로 맺어진 씨줄과 날줄이라면 족하지 않겠는가? 나와 엮어진 수많은 인연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노력하리라 마음먹으며 귀가를 서둘렀다.

오어사로 향하는 발길은 뜸해지고, 호수 속에는 단풍이 덮인 운제산이 잠겨 있었다.

소중한 인연의 울타리로 돌아가라고 운제산은 조용히 나를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