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 장미숙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낡은 담벼락 풍경이 추상화로 바뀌어 간다. 계절은 스스로 색을 덜어내고 여백을 넓히는 중이다. 구체적이고 또렷한 풍경화에서 어느새 의식형태로 바뀐 그림은 수많은 물음표를 달고 있다. 옷과 살을 벗어버린 뼈들, 뼈들이 던지는 질문이 웅숭깊다. 얽힌 뼈들 사이로 말라비틀어진 잎사귀가 간당간당 바람의 옷자락을 붙든다. 저건 미련이라는 것인가. 초탈과 미련의 경계 어디쯤에서 서성이는 것이리라.

앙상한 뼈가 손에 만져진다. 언젠가부터 ‘뼈밖에 없다’라는 말 앞에 저항이 생겼다. 계절이 바뀌면서 뼈가 더 드러난 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반응하는 것일 터이다. 찬바람이 살갗을 휘저어 퍼런 멍을 들여놓으면 뼈들은 웅크린다. 뼈의 등이 피부를 들어 올리고 뼈는 융기한 산들처럼 뾰족해진다. 바람 앞에 속수무책, 추위가 느껴지는 건 뼈가 내지르는 비명이다.

뼈들이 담장을 끌어안고 오체투지 중이다. 앙상한 손으로 벽을 더듬는다. 지난 계절 온몸을 채웠던 푸른 기운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담쟁이는 헐벗은 채 계절을 견디어야 한다. 견디는 것들은 바람을 몸에 들이고 산다. 그렇지 않으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테니까. 바람과 동거하는 동안 스스로 강해지는 뼈는 벽을 붙잡고 점점 자기최면에 빠진다. 판단은 각자의 몫, 누군가는 담쟁이에서 허무를 보고 누군가는 내면의 세계를, 누군가는 가능성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벽을 그러쥔 담쟁이가 떠오르는 건, 한겨울 어둠 속을 자전거로 달릴 때다. 영하의 날씨, 이른 아침은 추위가 절정에 달하는 시간이다. 지나는 사람조차 찾기 힘든, 깊은 겨울의 적막을 가를 때 처절함과 환희가 동시에 터진다. 가로등 불빛에 환한 뼈를 드러낸 나무가 ‘쯧쯧’ 혀를 차면 내 몸의 피는 오히려 뜨거워진다. 너만이 아닌, 나만이 아닌, 우리는 이렇게 같이 가는 것이구나. 그런 자기최면에 빠지면 삶은 견딜만한 것이 된다.

담쟁이는 지금도 벽을 붙잡은 채 안간힘으로 등을 세우는 중이다. 죽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인가. 벽을 그러쥔 손아귀에 깊은 의지가 내비친다. 아니다. 그건 순전히 내 마음의 투영이다. 담쟁이는 그저 버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버틴다는 건 숭고한 삶의 진리다. 살아가는 일이란 늘 버티는 것의 과정이다. 버티지 않고 어떻게 시간의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인가. 물리적인 고난만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는 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없는 비바람은 순식간에 삶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럴 때 바닥을 움켜잡고 버티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시간 속에 침몰해버릴지도 모른다.

버티기 위해서는 온몸의 기를 중심으로 모아야 한다. 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일,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바닥과의 친화력도 필요하다. 바사삭 메마른 담쟁이가 끝내 벽에서 분리되지 않는 건 버티는 힘을 터득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따뜻한 계절이 오면 다시 시퍼런 오기를 팔랑팔랑 흔들며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말라서 곧 부서질 듯 그토록 앙상하던 줄기에 숨겨놓았던 푸른 의지가 생생히 돋아나는 계절에 담쟁이는 환희로 빛난다. 견딤과 기다림의 결과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생존의식으로 발현된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라는 말에 반발심이 일어나던 때가 있었다. 살아진다는 그 막연한 말속에는 관념보다 더 잔인한 무관심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살아본 사람들, 그들에게 지나온 과거는 무료할 때 들춰보는 옛이야기쯤일 수 있겠지만 현재 물에 빠진 이들에게는 숨이 막히는 상황이다. 물살을 헤치고 깊은 강을 건너간 사람들의 여유는 때로 공허함만 부추길 때가 있다. 우월감에서 비롯된 동정은 진심이 없으므로 울림이 없다.

그런 충고를 들을 때마다 차라리 모른 척 내버려 두기를 바랐던 적이 많았다.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말은 오히려 깊은 절망을 몰고 왔다. 내려다보는 이들로 인해 한층 높아진 층은 아득했다. 차라리 벽을 그악스럽게 붙잡고 있는 담쟁이의 가슴을 들여다보는 게 나았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날, 얇은 살 속을 뚫고 뼈를 난타하는 바람 속에서 담쟁이 줄기처럼 차라리 웅크리고자 했다.

그렇게 몸을 웅크린 지 오래되었다. 껍질에 갇힌 애벌레처럼 밖으로 선뜻 나가지 못하고 그늘만을 찾았다. 부신 햇살이 두려워서 눈을 감았다. 밝음이 주는 눈부심은 왜 그토록 낯설었을까. 내 것이 아니라 여겼으니 내 것이 될 리 없었다. 파란 이파리 속에 뒤덮여 있는 담쟁이덩굴의 뼈처럼 오그림에 익숙해졌다.

어려서부터 여유를 배우지 못했다. 아니, 여유를 체득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겠다. 여유는 배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터득해가는 생활의 한 방편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늘 신기루처럼 아득한 그 무엇에 대한 동경으로 목이 말랐다. 물만으로 채울 수 없었던 깊은 허기가 뼈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뼈가 단단해지는 순간에도 채워지지 않은 깊은 공허를 품고 있었다.

삶이 무엇인지,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몰랐을 때도 마음을 탁 놓고 활기차게 까불거리던 기억이 별로 없다. 주위는 늘 살얼음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바람의 돌기가 겹겹이 에워싼 듯 싸늘한 날들이 이어졌다. 세상을 뼈로 산다는 건 절박함과 닿아 있다. 간절함을 넘어선 절박함 속에 뼈는 최전선의 방어를 담당했다. 몸으로 막아선 날들이 뼈를 더 두드러지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담쟁이의 근본은 채우고 비우는 것에 있다. 바람에 냉기가 차기 시작하면 낱낱이 털어주고 스스로 긴 침묵 속으로 빠진다. 주저함이 없다. 원래 그러했으므로 욕심도 의지도 놓아버리고 초연하다. 미리 결심하는 것, 준비하고 당하는 것에 익숙하다.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세상사에 메이지 않는다.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오로지 현실을 수긍한다.

어느 순간이 오면 삶이 조금은 나아지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견디기 위해서는 뭔가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니 절망과 고통 옆에 의식적으로라도 희망이란 글자를 놓아두었다. 그렇게 미래를 나름 꿈꾸었다. 그 미래가 가까워졌음에도 뼈는 아직 앙상하다. 찬바람은 수시로 뼈에 길을 내고 터를 잡는다. 바람의 터가 넓어지면 몸도 마음도 흔들린다.

담쟁이의 침묵은 길다. 침묵을 읽어낼 혜안이 있다면 뼛속 바람을 몰아내고 꼿꼿해질 수 있을까. 파란 꿈이 아직은 아득한 길에서 뼈들이 우는 소리가 우렁우렁 귓전을 서성인다.

(『선수필』, 2024년 가을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