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고무신 / 진해자

 

 

자동차는 쭉 뻗은 아스팔트 길을 달려 숲길로 들어섰다. 진초록의 자연을 만나는 건 숨 막히는 공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쌩쌩 달리던 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만나자 저절로 속도가 느려진다. 빠르게 지나칠 때는 잘 보이지 않던 풍경이 천천히 눈으로 읽힌다. 뭐든 자세히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바람의 소리가 들리고, 우거진 숲 사이로 살포시 내리는 햇살도 보인다.

한라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성판악 입구에 도착했다. 산행이 처음인 딸들은 호기심 반, 걱정 반이다. 산 날씨는 변덕스러워 예측이 어렵다. 잠깐 비추던 해가 구름에 가려 하늘은 금세 잿빛으로 변한다. 묏바람이 싸늘하게 옷깃을 파고든다. 어슴푸레한 안갯속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시작될 산행의 어려움을 까마귀는 온 힘을 다해 알리려나 보다.

입구에서 QR코드를 찍고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거친 돌길이 이어졌다. 가파른 곳이라 돌을 딛는 발이 조심스럽다. 한발 한발 집중하며 걷는데 앞서가던 스님 일행을 만났다. 스님은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고무신을 신고 산을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등산화의 튼튼함을 믿고 거침없이 돌길을 헤집고 나아갔다. 둔탁한 밑창에 눌려 돌이 부서진다, 흙 위로 나와 있는 나무뿌리와 작은 풀들이 아프다고 소리치는 듯하다. 등산화의 발길에 여기저기 흙이 파이고 돌이 무너져 내린다.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간 자리엔 풀도 자라지 못한다. 반면 고무신을 신은 스님의 걸음은 고요하고 부드럽다.

스님 뒤를 천천히 따라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주 신중하다. 결코,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다음 내디딜 곳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고무신을 신어 힘들거나 불편하지 않으세요?” 얼굴에 땀을 훔치며 미소를 보내는 스님의 얼굴에서 이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스님은 산을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산과 호흡하며 온새미로 자연을 느끼고자 고무신을 신었다고 한다. 돌부리에 눌려 아프면 더 조심스럽게 땅을 밟고 자연 앞에서 겸손하지 않으면 다칠 수 있음을 배운다. 스님에게 있어 고무신은 ‘수행을 위해 함께 걷는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험난한 수행의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낡은 고무신 속에 담긴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음을 몸소 느끼는 듯했다.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은 주위를 돌아볼 겨를 없이 산을 오르는 일에만 집중한다. 튼튼한 등산화가 발을 보호해주니 돌길이나 가파른 오르막도 거침없다. 발에 차인 돌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쳐도 등산화는 꿈쩍하지 않는다. 오로지 제 할 일만 열심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요즘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등산화를 신고도 힘들다며 투덜거리던 막내딸이 고무신을 신은 스님을 보니 미안한지 묵묵히 산을 오른다.

고무신을 보면 소박하고 검소한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하얀 고무신을 신고 읍내에 다녀오곤 했다. 다녀온 후에는 언제든 신고 나갈 수 있게 깨끗이 닦아 신발장에 보관했다. 밭일 갈 때는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가 없으면 신발장을 먼저 봤다. 흰 고무신이 없으면 외출한 것이고 검정 고무신이 없으면 밭일 가신 거다. 하지만 지금은 흰 고무신도 검정 고무신도 놓여 있지 않다. 고무신을 신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어릴 적, 졸졸 흐르는 개울물에 고무신을 띄우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따라가곤 했다. 무심히 떠내려가는 고무신은 자유로운 영혼을 실은 나룻배 같았다. 지상의 미련을 다 버리고 천천히 노 저어가는 나룻배처럼 어머니도 하얀 고무신을 신고 말없이 떠나갔다. 강을 건넌다는 건 지상의 인연과 작별함이고, 그 사람의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다.

소멸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이 동반된다. 하얀 고무신이 누렇게 변하도록 지난한 삶을 살아온 어머니는 고무신이라는 마음 그릇에 인생 여정을 담았다. 척박한 밭을 일구고 거친 길을 걷느라 하루도 낡은 고무신을 벗을 날이 없었다. 닳아 해져도 버리지 못하고 군데군데 바늘로 기워 신었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도 고무신처럼 꿰매며 살았으리라. 친정집에 가서 신발장을 열면 낡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을 것만 같은데···.

어릴 적에 어머니가 사준 검정 고무신이 생각난다. 가끔 운동화나 구두를 신은 친구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많이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클로버가 가득한 길을 걸을 때면 얇은 고무 밑창으로 땅의 촉감과 풀의 부드러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기어가던 벌레도 고무 신발 위로 올라와 잠시 놀다 간다. 어떤 날은 달팽이 집이 되었다가 쥐며느리 집도 되었다.

돌길에선 함부로 뛰어다니지도 못했다. 조금만 뛰어도 돌부리에 눌려 발이 아팠다. 자연스럽게 거친 곳은 피하고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고무신을 신으면 자늑자늑 걸을 수밖에 없다. 비가와도 걱정 없고 흙이 들어가도 물에 씻어 널면 금방 말랐다. 어머니와 밭에서 돌아오는 저녁이면 붉은 노을이 고무신 위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흘러서 더 그리운 시간이다. 어릴 적 개울물에 띄운 고무신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한참을 오르니 정상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상 더 걸렸다. 천천히 걸어서 그런지 몸은 전보다 덜 힘들다. 딸들은 처음 올라본 정상이라 뿌듯해한다. 백록담을 둘러보는데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소나기가 와르르 쏟아진다. 서둘러 하산 준비를 했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때로는 소나기라는 위기를 만난다. 하지만 소나기는 잠시 내리고 그친다. 인생의 고비도 소나기와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늘 힘들고 아플 것 같지만, 세차게 내리다 그치는 소나기처럼 다 지나간다.

정상의 날씨와 달리 밑으로 내려갈수록 하늘이 참 맑다. 주위를 돌아볼 겨를없이 직진으로 달리던 생활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완만한 곡선이 보인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은 지치고 힘든 이에게 넓은 품을 내어준다. 가난하고 구부러진 삶도 가끔은 그리울 때가 있다. 어머니가 계셨으면 나란히 고무신 신고 어둠이 내려앉는 산 어디쯤 하나의 풍경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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