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렁 그네 / 이남희

 

 

 

누군가를 청산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전등사를 짓던 대목장大木匠은 사하촌의 주모와 사랑에 빠진다. 멋진 집을 지어 아롱다롱 살자 하던 주모는 그러나 공사 막바지에 이르러 야반도주해 버린다. 사랑의 배신자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대목장은 쪼그려 앉은 나부상裸婦像을 조각하여 평생토록 대웅전 처마를 떠받치게 한다. 대목장의 비껴간 사랑은 그렇게 아픈 전설이 되어 참회의 정물로 전등사에 남겨지게 되었다.

여주에 가면 목아木芽 박물관이 있다. 오백 나한과 부처를 조각한 도편수의 피멍 든 손을 그곳에서도 보았다. 나부상을 조각하여 성불시킨 대목수처럼 고묘한 손이었다. 대작들을 보면서 나무와 신적 교감이 이룬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편수와 목신木神의 운명적 결합이었다.

처자식을 떠나와 짓는 절간 터는 목수木手와 목신이 수없이 접신했을 공간이라 여겨졌다. 날짐승 들짐승들의 교접을 신이 허락한다는 한밤중, 산속 동물들의 애무소리 스적이는 절간 야경은 신어미의 품이 되어 그들을 온전히 끌어안았을 것이다.

한 절에 이삼 년씩 머물러야 하는 대목장의 절 일은 도를 닦는 수행과도 같다. 그들의 절대 고독감을 세인이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만, 인생의 반을 산중에서 지내야 하는 그들의 숙명적 적적함은 어느 정도는 헤아려진다. 나무를 반려자로 삼아 가슴 속에 들어찬 공허감을 장인정신으로 채워갔을 터였다.

비자림 속에 숨겨진 고찰 불회사佛會寺, 그곳에서도 그런 수행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의 비바람은 무주공산 어디에나 세월 자국을 드러내는지, 불회사 대웅전의 대들보에도 금을 쩍쩍 벌여 놓았다. 인적 드믄 산속에서 거센 칼바람을 내려 앉힌 절간 용마루와 그것을 굳건히 떠받치는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무와 도편수가 한 세기 간 지켜내고 있는 밀애 탓이었을까. 도편수의 절대 고독이 신성을 이룬 법당에 기대서서 오래간만에 나의 흐려진 생각들을 다잡아 본다.

큰 나무를 보면 엎드려 절하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마음이 그들과 같았을까. 도편수들은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는다. 나무를 신의 경지에 두고 정결한 의식으로 제를 지내고 제목을 고를 때도 쓰임에 맞는 나무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다. 나무를 베고 난 후에도 그 둥치에 소금과 흙을 덮어 고목의 쓰임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절을 올리고, 주춧돌 위에 세우는 기둥감이나 대들보는 나이테를 보고 나무가 살이 있을 때의 방향대로 세운다고 한다. 나무가 생시 적 제 몸의 기억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라니 나무에 대한 예우가 지극하지 않은가.

나무를 다스리는 도편수들의 망치 소리는 높낮이마저 없다고 한다. 나무의 몸을 다루는 그들의 예법이 예사롭지 않은 탓이다. 민흘림기둥이나 배흘림기둥에 가금을 대어 보면 나무의 기 흐름이 들린다고 하니, 이 또한 나무를 다듬던 때의 심기로 듣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목수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나무의 몸을 정성껏 돌본다. 절간의 대들보가 되든지, 해우소의 칸막이로 쓰이든지 간에 나무의 환생은 여러모로 도편수의 몫이 된다. 나무를 잘라내는 톱날의 힘보다 그것을 쥔 목수의 손길이 나무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질시와 미움을 모르는 순전한 나무가 대목장에 의해 고통스러운 나부상의 운명을 떠받게 되는 것도 나무의 지고한 순응성 때문이리라.

목수에게 부림을 받은 것이 나무의 운명이라면, 나무의 기억을 이어주는 일은 도편수의 숙명이다. 나무를 베어낸 것이 그들의 업보라면, 나무의 혼 줄을 이어 매는 과정 또한 그 업을 닦는 과정이리라. 대들보를 지탱하기에 알맞은 기둥목을 찾아 기 맞춤 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흐트러짐 없는 바심질 끝에 얻어지는 대목수의 염원 같은 것이다. 대목장이 불사한 절의 천 년은 도편수의 바심질로 떠받쳐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무는 그와의 기 맞춤을 천 년의 약속처럼 완고하게 지켜내고 있음일 터이고.

절 마당에 바람이 놀고 있다. 비질 자국이 선명한 산사 마당은 순간 바람 놀이터가 된다. 바람을 일러 숲이 우는 소리라고 누가 말했던가. 울며불며 수 천 년을 살아 낸 다도면의 비자나무 숲은 여전히 불회사 절터 주위에 우뚝하다. 나무처럼 겸허히 살아내지 못한 나의 가슴으로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다. 고적한 절간을 서성거리다가 살그머니 대웅전 뒤 안을 들여다본다. 기다란 대나무 시렁이 시렁 가래에 매달려 있다. 그 위에 나뭇잎이 군데군데 엊혀서 흔들린다.

대웅전 뒷벽에 달린 그 시렁이 왠지 낯설다.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의 생명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을 도편수들, 사랑을 잃고도 나무에 쏟는 지고한 그들의 집념, 그 외곬 사랑의 혼이라도 도량에 쉬어가라 매단 것일까. 나무를 사랑하다 죽어간 대목장들의 혼이 시렁 그네를 타고 있는 듯 보인다. 시렁 위에서 흔들리는 건 낙엽인가 시렁인가. 사랑이란 이처럼 낯설게 다가왔다가 부질없이 마음만 부려놓고 떠나가는 시렁 위의 바람 같은 것은 아닐는지. 그래도 마음속에 흔들리는 시렁 하나 걸어 두면 어떠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