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한 마리
2026-08-24 (월) 12:00:00 조옥규 수필가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초록 풀밭 위에 하트가 피어난다. 남편과 딸이 한 팔씩 들어 올려 만드는 팔 하트, 두 손을 맞대어 만든 손 하트, 손가락으로 만든 작은 하트까지 모양도 가지가지다. 사랑이 부끄럽다며 행복하게 웃는 둘의 모습에 나도 따라 웃는다.
우리 가족은 고래를 잡으러 피스모 비치에 왔다. 저 바다 깊은 곳에는 예쁜 고래가 살고 있을까.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큰 바위 끝에 갈매기 두 마리가 다정하게 앉아있다, 몸집 좋은 펠리칸이 어슬렁거리고, 가마우지는 날개를 활짝 편 채 햇볕을 쬔다. 바닷가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평안이 달콤하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 위로 은빛 잔물결이 반짝인다. 이곳은 내가 한 마리 고래가 되어 거친 파도를 헤치며 마침내 도달한 피안처럼 느껴진다. 신선한 공기도, 꽃향기 배여 있는 바람도 모두 부드럽게 품속에 안겨든다.
나는 남편과 딸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이 순간이 소중하다.
두 번의 암 수술을 견딘 남편과 한창때를 살아가는 딸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인지, 나는 시간의 유한성에 대하여 자주 상념에 빠진다.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보다, 남은 시간에 마음을 더 기울이고 싶어진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건져 올린 작은 기쁨 하나도 먼 훗날에는 한 마리 고래가 되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저녁노을이 하늘과 바다 위에 붉게 번진다. 하루를 다 살아낸 해가 천천히 모습을 감춘다. 우리 세 사람은 벤치에 앉아 저마다의 하루를 돌아보며 말이 없다. 누구는 해 뜨는 일출이 아름답다지만, 나는 하루를 무사히 마감하며 내려앉는 일몰이 더 마음을 울린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려앉자 바람이 인다. 넘실거리는 물결위로 인고를 제일의 덕목으로 알고 살아오신 어머니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삶이 힘들어도 자식을 바라보며 살아오신 어머니, 돌아보면 나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건네는 작은 기쁨과 소망이 있었기에 지난날도 아름다울 수 있었다.
호텔방에 들어오자 딸이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놓는다.
청력이 좋지 않은 아빠와 말로 소통하기 어려우니, 사진이라도 함께 보며 지나온 시간을 나누고 싶은 자식의 애틋한 배려다.
앨범을 펼치는 순간, 웜홀이 열린 듯 과거의 시간이 되살아난다. 시간이 멈춘 사진 속에는 친정어머니도 살아계신다.
“언제 돌아오는 겨?” 손을 잡으며 눈물짓던 어머니는 내가 미국에 온지 석 달 만에 돌아가셨다.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것들은 끝내 지키지 못했고, 그 미뤄 놓은 일들은 회한이 되어 마음 안에 똬리를 틀었다.
사람은 삶의 일몰이 오기 전에 미련과 후회의 구름을 걷어냈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소중했던 것들을 알아보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만 하고 싶다.
오늘 우리는 마음속에 그리움이 밀물처럼 차오르는 날,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떠오를 예쁜 고래 한 마리를 품었다.
<조옥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