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의 독서칼럼]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

 댓글 2026-09-03 (목) 12:00:00 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
 
오스만 제국의 몰락 이후 이스탄불은 과거를 지우고 근대 도시로 나아가려 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파묵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상실감과 공허감을 답답하고 침울하게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이스탄불은 어둡고 회색빛이 감도는 장소였다. 지난 150년 동안 도시에 내려앉은 패배감과 빈곤, 폐허의 흔적을 감추어주는 어둠과 눈 내리는 겨울을 그는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옛 이스탄불을 그린 서양화가들의 그림을 보며 도시의 아름다웠던 과거를 확인하고 위로받으려 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은 휘진(Huzun)이다. 휘진은 한 개인이 느끼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 이후 폐허와 빈곤 속에서 살아온 이스탄불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든 집단적 멜랑콜리(Melancholy)이다. 과거의 영광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패배 의식, 또 언제든 몰락과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불안이 오랜 세월 축적되어 만들어진 정서다. ‘비애’라고도 번역되지만, 파묵이 말하는 휘진에는 슬픔을 견디며 그것을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려는 마음까지 담겨 있다. 도시의 역사와 사람들의 감정을 세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이스탄불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그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도시이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놓여 정치와 권력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흔들려 왔다. 파묵은 그러한 나라와 도시의 정체성을 자신의 성장 과정과 연결해 표현한다. 익숙한 문화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고 새롭게 들어선 문화를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이 겪었을 불안과 혼란을 생각하며, 나는 같은 시대를 지나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떠올려 보았다.

물론 튀르키예의 ‘휘진’과 한국인의 ‘한’이 같은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상실과 슬픔을 함께 품어왔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닮았다고 느껴진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단순하고 피상적인 인상을 넘어,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본다면, 한국인의 어떤 정서를 발견하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파묵이 태어나기 한 세기 전의 이스탄불은 여러 민족과 종교, 언어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그러나 공화국 수립 이후 서구화와 근대화가 진행되고, 1928년에는 기존의 아랍계 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문자 개혁이 이루어졌다. 파묵은 이 과정에서 과거의 책과 섬세한 문화가 등한시되고, 오래된 문명과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느낀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어우러졌던 화려한 도시는 점차 낡고 텅 빈 흑백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이 책에는 가족사진을 비롯해 오래된 건물과 골목, 보스포루스와 이스탄불의 풍경을 담은 수많은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은 단순한 자료에 머물지 않고 파묵이 말하는 도시의 기억과 휘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독자는 그 사진들을 통해 당시의 이스탄불과 작가가 표현하려 한 정서에 한층 다가갈 수 있다.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은 단순히 한 도시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한 인간의 성장과 한 도시의 운명이 어떻게 서로를 비추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기록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이스탄불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곳처럼 느껴진다. 도시의 풍광뿐 아니라 그곳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과 정서까지 이해할 때 여행은 더욱 깊고 풍요로워진다. 그것은 이스탄불뿐 아니라 우리가 찾아가는 어느 도시에나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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