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입보다 앞에 있는 사람 / 노혜숙

신분의 구별이 서슬처럼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평민들과 음식을 한상에 나누며 나랏일을 의논하는 일은 당시 흔치 않았다. 더구나 전쟁의 승패를 가리는 막중한 사안에 위아래 가리지 않고 의견을 구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순신은 달랐다. 작전본부의 이름을 ‘계책을 운용하다’란 뜻을 지닌 운주당運籌堂으로 짓고 누구든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견을 내게 하고 귀를 기울였다. 일찌감치 인간 빅데이터를 활용한 셈이었다. 장군이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결에는 운주당의 목소리를 경청한 덕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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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傾聽’은 기울어질 경에 들을 청자로 구성되어 있다. 들을 청자를 파자해서 보면 열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듯 한 마음으로 임금처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처럼 듣는다는 말에는 임금(聖人)은 입(口)보다 귀(耳)가 앞서 자리(壬)하여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입보다 귀가 앞에 있어야 한다는 이 메시지는 듣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일깨워준다.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귀가 나를 가르쳤다”는 징기즈 칸의 말 역시 경청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명언이다. 그것이 비단 임금에게만 적용되는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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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청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자기중심적 존재인 데다 흔히 인정받고 싶은 자아욕구가 경청의 요구를 압도한다. 상대보다 내가 더 잘나 보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의사소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율은 7%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표현된 말은 빙산의 일각인 것이다. 말의 맥락을 헤아려 듣지 않으면 말의 진짜 의도를 지나치기 쉽다. 말의 의도와 동기가 수면 아래 잠겨 있기 때문이다. 경청한다는 건 말의 표면을 둘러싼 동기 의도 감정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다. 당연히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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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면 돈을 들고 말 들어주는 사람을 찾아갈까. 심리 치료의 절반은 들어주는 일이라고 한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많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경청을 왜 삶의 유능한 기술이며 능력이라고 했는지 알 듯싶다. 나 역시 같이 사는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일 테다. 그러면서도 공감과 위로를 바라고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서운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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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말을 편안하게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 그의 곁에는 늘 사람이 많다. 말하는 이가 누구이든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처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저 들어줄 뿐 상대의 말에 주석을 붙이지 않는다. 귀를 빌린 사람들은 실컷 하소연을 털어놓은 후 누그러져서 돌아간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래도 누군가는 들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마치 경청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한결같이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귀를 내어준다. 나도 가끔 그 고마운 귀를 빌린다. 그의 경청에는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 겸허함이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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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청자이화자一聽者二話者, 듣는 사람이 첫째고 말하는 이가 두 번째라는 뜻이다. 나는 고맙게도 그런 고수들과 일한 적이 있다. 내가 어느 문예지 편집 일을 맡고 있을 때 기꺼이 듣는 입장이 되어 일을 도와준 분들이다. 내가 무탈하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분들 덕이다. 그분들은 입보다 귀를 앞에 두었다. 경청은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안다. 상대를 존중하고 겸손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분들에게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경청의 지혜를 배웠다.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된 선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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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내 작은 책방의 고립을 즐긴다. 책들이 운주당의 고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던가. 대부분 밑줄을 그으며 읽은 책들이고 여러 번 읽었던 책도 부지기수다. 뭔가 길이 보일 것 같았지만 수많은 이정표 앞에서도 인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제자리걸음이었다. 나는 늦되는 사람이었고 책 속의 세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지적인 희열만으로는 밥을 먹고 사는 자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책은 몸으로 깨쳐 얻은 지혜의 힘을 앞서지 못했다. 현실은 환상이 깨진 폐허 위를 온몸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실전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 알량한 운주당 놀이가 모두 헛것이란 말은 아니다. 나의 오랜 경청의 공을 외면하지 않은 책들이 다름에 대한 열린 시각과 확장된 공감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결핍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과 그 때문에 섬세하게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 또한 책이 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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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책 속의 활자보다 가까운 이들의 육성을 더 경청했을 것이다. 평생 곁에 있으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고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보다 서글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힌디어 인사법 나마스떼Namaste는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인간에 깃든 영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일까. 내 앞의 사람을 신적인 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청의 시작일 테다. 그런 자세 앞에 열리지 않을 빗장이 있겠는가. 어쩌면 경청은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좌우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는지. 저 옛날 운주당의 경청과 열린 소통이 새삼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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