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각, 연결의 순간 / 김은숙

오래된 서랍의 깊숙한 심장을 연다. 손때 묻어 바랜 나무 서랍장 안에 묵직한 고요가 수북하다. 한때 찬란했을 원색의 철제 상자는 무심히 시간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대단한 물건이라도 간직한 듯 멋스러운 외형이다. 상자 안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자리를 이탈해버린 단추가 가득하다. 크기도, 모양도, 색상도 다른 것들이 섞여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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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동글한 플라스틱 단추가 어린 시절 입었던 멜빵바지를 데려온다.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 쨍한 노란색이라니, 필시 얌전한 옷에 매달릴만한 색은 아니다. 어린이의 발랄한 감성에 어울릴법한 단추는 장난기까지 서렸다. 한때는 세상을 누볐을 시간이 차곡차곡 담긴 단추 하나가 이제는 놓쳐 버린 시간에 대한 허무를 증명한다. 기억은 흐릿하게 다가오지만, 그날의 감정은 꽤 구체적이다. 놀이터에서 놀다 그네에서 맥없이 떨어졌다. 그네의 이음새에 옷이 걸린 찰나 이탈해버린 단추는 흙바닥에 뒹굴었다. 그것들은 무릎에 난 상처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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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빛바랜 누비옷에서 풀려난 옥색 자개단추는 표면이 매끈하다. 선명하게 뚫린 두 개의 구멍에 명주실의 흔적이 남았다. 삶을 지탱하느라 꽤 버거웠나 보다. 야무진 누비옷만큼이나 단추도 할머니의 성정을 닮았다. 내가 몹시도 앓던 밤이었다. 무슨 연유로 끙끙 신음을 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의 뜨거운 손이 밤새 내 이마를 짚고 있었던 건 선명하다. 단추는 그 새벽의 상황들을 퍼즐처럼 끼어 맞춘다. 할머니는 때로 엄격한 분이었지만 속정만큼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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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양복 소매 끝에서 떨어진 묵직한 금속 단추들은, 어린 날의 불안과 무심한 이별의 징표처럼 남았다. 여물지 못한 무게로 고단한 아버지의 어깨에 기댄 어린 날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양복은 내게 크고 먼 세계였다. 어른이라는 경계를 짓는 양복은 단추 또한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가족의 일원이지만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양복 단추는 보금자리로서의 안온함을 주었다. 하지만 금속 단추를 더 깊이 알기 전에 이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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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색이 진하고 옅은, 혹은 모양이 가지가지인 단추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의 시간과 체취를 통해 의미로 거듭난 것들이다. 육체를 감싼 옷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시간의 매듭 속으로 흘러들기까지 그것들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채, 오랜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존재의 가장자리에서, 불완전한 기호로 현존하는 기억의 파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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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손잡이를 잡은 순간부터 세월의 숨결은 이미 내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잊힌 모든 감각이 생동하는 풀처럼 일어났다. 순간의 감정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고 잠시, 혹은 오랫동안 내면의 강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물결이 되어 작동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영역 속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응축돼 있던 기억 세포들이 일정한 공간을 형성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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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상자의 붉은색은 세월에 바래 상실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단추를 간직했기에 상실은 새로운 역할의 기회를 맞았다. 플라스틱 원색의 단추들은 고민 없이 지내던 시절의 표상이다. 금속 단추는 우주의 고독을 재현하는 쓸쓸한 별빛처럼 빛난다. 묵직한 가장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준 든든함으로의 의지가 묻어난다. 나무 단추는 사라진 온기의 잔여물에 불과한 포근함을 전한다. 옷의 기능, 혹은 멋스러움과 편리함을 위해 설계된 단추의 역할이 멈추지 않았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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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한때 무언가를 굳건히이어주던 고리였으나, 이제는 의미를 잃은 둥근 조각, 해체된 기호로 존재한다. 낡은 옷들이 버려질 때, 단추는 뒤편의 삶처럼 폐기된다. 죽은 자의 옷은 체취를 단추가 온전히 가지고 간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분리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본체를 잃어버리고도 남은 단추들, 침묵으로 세월을 대변하는 건 이미 현상을 초월한 상태다. 때로 침묵은 천 마디 말보다, 천 개의 질문보다 웅숭깊다. 그것은 존재론적 침묵이며 부재한 시간에 대한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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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잃고, 깨뜨리고, 흩어 놓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 혹은 온전했다고 믿은 내 모습들이 늘 그대로 둥근 형태는 아니다. 이 모든 건 옷에서 떨어진 단추처럼, 서로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단추는 옷이 품은 말이고 분위기다. 하지만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어느 날은 거추장스러움으로, 어느 날은 억압된 형태로 나타난다. 벗어버린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결국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주워 담을 수밖에 없다.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들여다보고, 깨진 관계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역설이 기다린다. 낡은 옷에서 단추가 떨어졌다고 기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물론 부조화를 감수해야 한다. 우리 삶 또한 그렇다. 부서진 조각들을 통해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며, 새로운 것에 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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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틈새와 균열 속에서, 작은 단추들은 과거의 흔적이자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을 품은 기호들이다. 여러 종류의 단추를 바닥에 깔아 놓고 탑을 쌓기 시작한다. 버려지고 잊힌 존재의 잔해를 주워 모으는 반복적인 행동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어쩌면 우리 안에는 삶의 흩어진 조각들을, 부서진 자아의 파편들을 모으는 회귀 본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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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게 쌓은 단추 탑을 바라보다 손이 멈춘다. 무심코 단추 하나를 집어 다른 구멍에 맞춰 살짝 돌려본다. 찰나의 순간, '딸깍' 작은 소리가 난다. 물리적 마찰음을 넘어 과거의 시간과 의미가 다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아 제자리에 끼웠을 때의 희열과 같다. 약하지만 큰 힘을 가진 단추에서 미래의 자화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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