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 / 고경서(경숙)
낙서는 예술인가, 비예술인가?
사진작가 마틴 불의 <Who is Banksy> 라는 전시회에서 뱅크시의 삶과 예술을 사진으로 만났다. 그의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그라피티를 모티프로 한 기발하면서도 개성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그것을 통제하는 개인의 자유를 고발하고, 폭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낯설고, 생동감 있게 풀어낸 작품들로 꽉 찬 공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작품들마다 강렬한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다고나할까. 숨죽인 고요가 긴장감을 부추겼다. 작가의 메시지들이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항변하는 목소리도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여태껏 봐온 낙서와는 품격이 다르다.
‘그라피티’는 이탈리아어로 낙서를 뜻한다. 도시의 다리 밑이나 낡은 건물 벽면에 래커나 스프레이페인트를 뿌려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일컫는다. 이를 행하는 자의 생각이나 행동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뱅크시처럼 블랙코미디나 풍자로써 저항 의지를 표출하면 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가 하면, ‘경복궁 낙서’에서 보듯 가차 없이 무시를 당하거나 처벌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이처럼 하나의 대상이 양가적 성격을 띤다. 여태껏 낙서를 ‘글씨나 문양을 장난삼아 함부로 끼적거리는 나부랭이’로 치부해온 고정 관념에 이 전시회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며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뱅크시는 영국 출신의 거리예술가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익명의 작가다. <풍선과 소녀>는 그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런던 곳곳에서 발견된 이 그림은 소녀가 하늘로 날아가는 빨간 하트 모양의 풍선을 잡으려는 모습을 표현했다. 구도와 색상이 단순한데도 유명해진 건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벌어진 파격적인 퍼포먼스 때문이다. 낙찰된 직후 액자 틀에 숨겨진 파쇄기가 작동하다가 결함으로 작품의 절반가량이 가늘고 긴 조각들로 찢어졌다. 이를 2021년에 <사랑은 쓰레기통에> 라고 이름만 바꿨을 뿐인데 환상적인 가격보다 미술 시장에서 규칙을 깬 사건으로 더 알려졌다. 애초에 돈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예술품을 비판하려한 작가의 의도가 아이러니하게도 빗나갔던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이란 책에서 사진을 ‘그것이 거기 있었다’ 라고 정의한 바 있다. 사진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의 증거이자 시간의 상실을 전하는 매체라고 볼 때 뱅크시의 부재하는 기록물들을 마틴 불이 증명한 셈이다. 여러 섹션으로 구성된 작품 중에 특히 쥐 그림이 많았다. 낙서의 속성상 소유자와 분쟁을 겪다 보니 쫓고, 쫓기는 작가의 분신으로 그렸다고 한다. 소녀나 호텔 청소부 등 사회적 약자와 유명 인사, 명화까지 패러디했다. 권위적인 여왕의 얼굴을 원숭이로 변모시키거나 어린이가 폭탄을 장난감처럼 껴안았다. 신비로운 미소의 <모나리자>가 소총을 들고,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귀걸이 대신 보안경보기를 매달아 모순되고 불합리한 사회현상을 극대화한다.
그 외에도 십자가에 박힌 예수가 두 손에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림은 현대인의 소비 행태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작품들 대개가 세상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서 통치자와 공권력에 대항하고, 전쟁이나 폭력에 맞선 자유와 희망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의 병폐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희화화한 작품들은 비장미로 읽혀지면서 타자의 고통에 공감케 한다. 하나같이 감각적이고 도발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기존의 낙서에 대한 관점을 바꿔놨다고 할까.
예술과는 사뭇 다른 낙서를 기억한다. 가난하던 시절, 우리는 원초적인 낙서에 익숙했다. 후미진 담벼락이나 냄새나는 공중변소엔 으레 낙서가 차지했다. 누가 썼는지도, 그 의중도 알 수 없는 본능적인 욕구를 과장한 저급하고 유치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자기 존재를 알리거나 누군가에게 고백하지 못한 사랑을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외설적인 문구로 배설하듯 쏟아냈다.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한 그 낙서들은 지금보다는 순수한 면이 있었다. 시각적인 피로감이 크고, 윤리의식에 책잡힐지언정 상처를 주거나 해코지도 없어 그냥 못 본 척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하지만 SNS가 급속도로 발전한 요즘은 낙서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익명을 내세워 개인의 욕구와 이기심을 물리적인 벽이나 장소가 아닌 가상공간에 무차별적으로 쏟아놓는다. 언어에도 창이나 총검이 있어 특정인을 겨냥하면 순식간에 살아있는 무기가 된다. 인터넷 댓글 창은 약점이나 흠결을 마구잡이식으로 폭로하고, 비난하고, 모욕을 주는 성토장으로 변한다. 분명한 것은 뱅크시의 낙서와는 다른 양상이다. 세상의 어둔 민낯이다.
낙서는 때론 감정을 정화해 주기도 한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습관처럼 낙서를 한다. 노트의 여백이나 메모지에 즐겨본 만화의 여주인공을 그린다. 옥죄는 불안을 토해내는 입술, 짓누르는 울분을 내비치는 눈매와 무너진 자존감을 세우는 오뚝한 콧날은 내가 닮고 싶은 얼굴이다. 연필로 한 올 한 올씩 세밀하게 긋는 머리카락은 길고 풍성하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엉클어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 어떤 이는 동그라미를 수없이 그린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힐링의 한 방법이다.
전시실 한쪽에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발견된 벽을 전시해 놨다. 뱅크시의 글씨가 또렷한 이 설치물은 전쟁의 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현장감을 전한다. 그 어떤 구호나 선동, 공격이나 투쟁에 앞서 전쟁의 잔혹성을 드라마틱하게 느끼게 해준다. 총칼이 아닌 붓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난민들의 인권과 평화를 갈망하는 작가의 확고한 신념을 엿볼 수 있었다. 이렇듯 작가는 자신의 의도가 민중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또 반응하는가에 대해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고 한다. 이는 끊임없이 추구해 온 예술 세계이기도 하다. 여전히 민중 미술가로서 심혈을 쏟고 있는 그의 어록을 떠올려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결과를 두려워하면 최선을 다할 수 없다.”
벚꽃이 핀 거리로 나섰다. 나무가 밀어낸 꽃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점점이 흩어지는 꽃잎들을 손에 쥔 바람이 허공의 벽면에 낙서를 휘갈긴다. 뿔뿔이 흩어지는 자음과 모음들. 고유한 색채와 향기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 채 창의적인 발상으로 그려내는 점묘화에 눈길을 떼지 못한다. 자연 또한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뱅크시 못지않게 조롱하고 비판하면서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고 안정케 하는 것 같다.
이번 전시를 통해 뱅크시의 그라피티가 인간과 세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고, 그 이면에 감춰진 삶의 본질을 파헤쳐 인식의 차원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내가 생각해 온 일반적인 낙서와는 차별화 된다. 진정한 의미의 예술도 고정 관념을 깨고,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어떤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앞에 언급한 뱅크시의 작품들이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