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끊긴 자리

 

 

 뇌과학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에 대한 놀라움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경험이 쌓이고, 낯선 것조차 익숙한 기억 속에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예순을 넘어서면서 그런 변화를 느꼈다. 젊은 날에는 작은 일에도 가슴이 뛰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세상에 새로울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 나이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아갔다. 어린 시절 달력 화보에서나 보았던 폭포였다. 그때는 세상에 저토록 거대한 물줄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직접 찾아가면서는 그때만큼 놀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걸쳐 있다. 오대호 가운데 이리호에서 온타리오호로 흐르는 나이아가라강에 형성된 폭포다. 이과수, 빅토리아 폭포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폭포 가운데 하나다.

 그중에서도 말굽 폭포는 거대한 수량과 장대한 폭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서 받은 충격은 폭포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이 끊어지고 있었다. 강은 흐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강은 산에서 시작해 들을 지나고, 마을을 돌아 바다로 흘러간다. 굽이치기도 하고, 여울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물길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강이 갑자기 끊어진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야 하고, 흐르는 것은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 연속성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눈앞에서 거대한 강이 갑자기 사라지고 있었다.

 유유히 흐르던 나이아가라강이 어느 지점에 이르자 무 자르듯 싹둑 잘려 나갔다. 강이 끊긴 자리에서 폭포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다시 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실제로 강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분명히 끊어진 것으로 보였다. 조금 전까지 하나의 수평면을 이루며 흘러오던 강물이 갑자기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평의 세계가 끝나고 수직의 세계가 시작되는 자리. 그 경계가 너무도 선명했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이 끊긴 자리 폭포가 되다. 얼마나 아플까. 생뚱맞게 조국의 삼팔선이 떠올랐다. 하나로 이어져 있던 땅에 어느 날 경계선이 그어졌다. 산맥은 여전히 이어져 있고 강물도 흐르는데, 사람들은 그 선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 자연에는 없던 단절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이아가라의 강물은 낭떠러지를 만나 떨어지지만, 다시 흘러간다. 그러나 분단된 땅의 사람들은 눈앞에 길이 있어도 건너지 못한다. 강물보다 인간이 더 부자유한 셈이다.

 

 유람선을 타고 말굽 폭포 가까이 다가갔다. 거대한 물의 장막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높고 넓었다. 희디흰 물줄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신이라도 쉽게 거두지 못할 것 같은 완강한 장막이었다.

 배가 폭포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소리가 커졌다. 처음에는 천둥소리 같았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 소리는 천둥보다 훨씬 복잡했다. 거대한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수많은 짐승이 한꺼번에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했다. 물이 저토록 무서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물은 부드럽다. 손바닥으로 떠 올리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그릇에 담으면 그릇의 모양을 따른다. 그런 물이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지면서 바위보다 더 단단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보라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얼굴과 옷이 흠뻑 젖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나는 물보라를 뒤집어쓰면서도 이상하게 돌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물의 부서짐이 너무도 격렬했기 때문이다.

 가차 없이 떨어진 물은 아래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흩어지고, 그 물방울들이 다시 모여 거대한 물안개가 되었다. 물의 단말마는 장렬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랐다. 공포인지 감동인지, 흥분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물의 아우성 속에서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그때 김소월의 「초혼」이 떠올랐다.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이름을 부르는 시인의 절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의 구절을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어째서 폭포 앞에서 「초혼」이 떠올랐을까.

 폭포수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산산이 부서진 물방울들은 다시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물이 죽음을 맞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나는 물의 죽음이 아니라, 한순간에 이전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존재의 슬픔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물은 더 이상 조금 전의 강물이 아니었다. 평온하게 흐르던 모습은 사라지고, 거대한 소용돌이와 물보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물은 물이었다. 부서졌으나 사라지지 않았고, 흩어졌으나 다시 모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강변 위로 올라가 폭포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물이 떨어지는 바로 그 경계가 눈앞에 있었다. 조금 전 유람선에서는 폭포를 정면에서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강물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물의 흐름과 추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면도와 평면도, 측면도를 모두 보는 셈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폭포를 보았지만 이처럼 입체적으로 폭포를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보는 위치가 달라질 때마다 폭포의 의미도 달라졌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폭포는 거대한 힘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 폭포는 돌이킬 수 없는 추락이었다. 옆에서 바라볼 때 폭포는 흐름과 단절이 만나는 경계였다.

 같은 폭포인데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신기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물을 어느 자리에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보면 장엄한 것이 위에서 보면 아찔하고,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이 가까이 다가가면 두렵다.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남의 불행은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불행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높이와 거리에서 그것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내가 본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강물이 떨어지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평온하게 흘러오던 물이었다. 서로 부딪치며 속삭이기도 하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기도 하고, 바람이 불면 작은 물결을 일으키며 흘러왔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앞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물은 알지 못한다. 물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흐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허공으로 떨어진다.

 그 광경이 내게는 너무도 끔찍했다.

 인간의 삶도 저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이 오늘처럼 이어지리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아침이면 일어나고, 저녁이면 돌아오고, 다음 주에는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한다. 다음 달의 계획을 세우고, 내년의 여행을 꿈꾼다. 그러나 삶의 어느 지점에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평온과 고통은 때로 한순간에 갈린다.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걸었던 사람이 오늘은 병상에 눕기도 하고, 아침에 웃으며 헤어진 사람이 저녁에는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폭포는 강물의 상처다.

 물론 자연의 폭포는 상처가 아니다. 지형의 높낮이와 오랜 침식이 만들어 낸 자연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강물에 난 거대한 상처처럼 보인다.

 흐르던 강이 갑자기 찢겨 나간 자리.

 수평의 평온이 수직의 고통으로 바뀌는 자리.

 폭포는 강의 흉터다.

 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크든 작든 흉터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지만, 어떤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상처가 모두 같은 모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상처 때문에 무너지고, 누군가는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간다.

 상처가 사람을 반드시 성장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앞에서 상처가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말하는 것은 때로 잔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도 다시 살아갈 힘을 찾아낸다. 상처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폭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물은 부서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서진 뒤에도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삶에서 중요한 것은 상처를 입지 않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입고도 다시 흘러갈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때 문득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가수 윤하의 노래 제목으로도 익숙한 말이다. 본래 천체물리학에서 사건의 지평선은 블랙홀을 둘러싼 경계로, 그 안쪽에서는 빛조차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그 경계를 넘어선 뒤에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나이아가라 폭포의 낭떠러지와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폭포수는 아래로 떨어진 뒤에도 다시 강이 되어 흘러간다. 그러나 나는 그 두 경계에서 묘하게 닮은 무엇을 느꼈다.

 넘어서기 전과 넘어선 뒤의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 어떤 경계는 건넌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된다는 것. 오래전 조국을 떠나 이민자로 살아온 내게 경계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미국에 살면서도 완전히 미국인이 된 것 같지 않고,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온전히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는 셈이다. 그 경계는 지도 위에 그어진 선이 아니다. 어느 날에는 말투에서 나타나고, 어느 날에는 생각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때로는 고향의 노래 한 곡을 듣다가 문득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경계에서 살아왔다. 어쩌면 조국의 삼팔선이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하나의 땅이 둘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며 자랐다.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만날 수 없는 사람. 그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삶을 갈라놓았다. 그런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탓일까. 나는 유난히 경계에 마음이 끌린다. 전환점, 변곡점, 분기점, 임계점.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바뀌는 바로 그 지점. 그전까지는 하나였던 것이 그 지점을 지나면서 다른 이름을 얻는 순간. 나는 그런 순간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하필 단풍이 곱게 물든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그 알 수 없을 것 같던 물의 경계를 보았다. 강물과 폭포수의 첨예한 임계점. 수평과 수직이 갈리는 자리. 흐름과 추락이 만나는 자리.

석양빛이 그 경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유구히 흐르던 강물은 그 선을 넘는 순간 폭포수가 되었다. 나는 그 경계를 마음속으로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불렀다. 물론 과학적 의미의 사건의 지평선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수많은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을 떠오르게 하는 경계였다. 고향을 떠나던 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던 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서던 날.

 그때마다 나는 어떤 선을 넘어왔다. 그 선을 넘기 전에는 몰랐다. 그것이 내 삶을 얼마나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를. 그러나 지나고 보면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그전의 나와 그 후의 내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폭포를 바라보며 내 생애의 그런 순간들을 떠올렸다.

 강물은 낭떠러지를 향해 흘러오면서도 자신이 곧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 어쩌면 너와 나의 삶도 저 경계선 위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웃고 떠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졌다. 누가 쳐다보지도 않는데 옷깃을 여몄다.

 

 단풍이 아름다웠다. 저녁노을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저 물줄기처럼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폭포수처럼 장엄하게 부서지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아주 평범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렇다고 서운할 것은 없다. 장엄하게 죽는다고 해서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애는 마지막 순간의 모습만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구를 사랑했는지,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누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는지. 그런 것들이 한 사람의 삶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다시 폭포를 바라보았다. 물은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부서지고 흩어졌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는 또 다른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자신의 모습을 잃었지만 물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광경에서 이상한 위안을 느꼈다.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도 언젠가는 흩어질 것이다. 내 몸을 이루던 원자들은 다시 흙과 물과 공기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주 먼 훗날에는 다른 생명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라는 의식이나 기억이 계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를 이루던 물질은 이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그 사실이 죽음의 두려움을 모두 없애 주지는 못한다. 다만 내가 이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폭포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거대한 물의 아우성 속에 서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고요해졌다.

 생각해 보면 강은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 눈에는 끊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물은 단 한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강이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또 다른 흐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처음에는 보지 못했다. 폭포의 장엄한 추락에 압도되어 부서지는 물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이 보였다. 강은 끊긴 자리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쩌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끝이라고 믿었던 자리에서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기도 하고,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뜻밖의 모습으로 남기도 한다. 물론 모든 단절이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별은 끝내 회복되지 않고, 어떤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했던 시간은 사랑했던 시간으로 남고, 함께 살아온 날들은 함께 살아온 날들로 남는다.

 

 예순을 넘기면 신기한 일이 줄어든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 달력 화보를 바라보던 소년보다 더 크게 놀라고 있었다. 물론 소년은 거대한 폭포를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순을 넘긴 나는 폭포에서 내 생애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내가 잃어버린 것도 많았고, 새롭게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그 세월이 없었다면 나는 폭포를 그저 거대한 물줄기로만 보았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신기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기함의 자리가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세상의 크기에 놀랐다면, 이제는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내 존재의 작음에 놀란다.

 석양이 강물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폭포를 돌아보았다. 강물은 여전히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장엄한 추락은 조금도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내 눈에는 부서지는 물과 다시 흘러가는 물이 함께 보였다.

 강이 끊긴 자리.

 

 그곳에서 강은 또 다른 모습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물소리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