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 씨 / 박귀숙
지난 5월 ‘친절한 금자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지매, 별일 없제?”
“근데 내 소식 들었어?”
“아니, 뭔 일?”
“건강검진 받았는데 암이래. 유방암….”
믿어지지 않았다. 4월에만 해도 그녀는 집 근처 농막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밭에서 쑥도 캐자고 했는데 못 가고 말았다. 그런데 유방암이라니…. 놀라는 나에게 그녀는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전화를 받고는 충격이 컸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2005년 겨울, 노량진에서 주택관리사 자격 대비반 수강할 때였다. 그녀는 어려운 시험공부 중에도 주변 사람들 공부하는 걸 곧잘 도와주곤 했다. 밥심으로 공부한다며 점심 도시락도 한 찬합씩 바리바리 싸 와서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러구러 자연스럽게 우린 친구가 되었고, 힘든 시간을 잘 버티고 시험에 둘 다 합격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친절한 금자 씨>를 보고 내 핸드폰에 이름 대신 그 영화 제목으로 저장했다. ‘친절한 금자 씨’라고. 그녀는 그해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여 년을 한결같이 직원들과 주민에게도 인정받는 따듯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소장으로 일했다.
그녀는 친절하고 베푸는 손도 컸다. 어느 날엔 손수 만든 갖가지 장아찌와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보내줬다. 추어탕과 곰국을 보내준 적도 있었다. 울산에 계신 시어머님이 건강이 안 좋아 병원 진료차 우리 집에 오셨을 땐 잣죽을 손수 끓여 병문안을 왔었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생일이나 기념일엔 쑥 인절미, 과일 등을 보내곤 했지만, 통이 큰 그녀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처음엔 그녀와 나 두 사람만 만났는데 어느 날 그녀가 집들이에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두 집 남편은 나이도 같고 성향도 비슷했다.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을 먹으면서 오랜 친구처럼 많은 얘기를 했고, 그날을 계기로 우리 부부와 그녀의 부부는 점차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운정 신도시로 이사하면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거래가 거의 없다가 지난해 부동산 시장이 큰 변화를 가져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일찍이 두 딸을 결혼시켰고, 가까이 그 딸들 가족이 있어 주말이면 가족들과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해왔다.
그녀에게는 암 가족력이 있어 항상 건강에 신경 쓰며 음식도 자연식이나 생식 등으로 꾸준히 챙겨 먹어왔다. 그런데도 암이 발병했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녀에게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만나자고 했더니 한사코 거절했다. 하긴 입원 전에 마음도 정리하고 하던 일도 마무리해 넘겨줘야 할 테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 그냥 치료 잘하고 하루빨리 건강한 얼굴로 보자고 했다.
“꽃 속에 잠시 쉬자.”라는 그녀의 카톡 프로필을 보고는 예쁜 꽃만 보면 사진 찍어 그녀에게 보내줬다. 하지만 그녀는 겨우 한 번의 항암치료에도 머리카락이 빠져 긴 머리를 비구니처럼 밀었다고 했다. 카톡 사진에 담긴 그녀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져, 할 말을 잃었다. 가슴에 태풍이 클 때는 할 말을 잃는다고 했던가. 그러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예뻐요. 눈, 눈썹, 모자 달린 가발도.”라고 써 보냈다. 치료 기간 전화를 차단한다고 했지만, 다행히 통화가 되었다. 애써 감추려는 그녀의 아픈 속내를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밝은 목소리였지만 그렁그렁 눈물이 느껴졌다. 나는 장하다, 대단하다, 박수를 보내며 매일매일 기도한다고 전했다.
지난봄 내가 이사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부동산에 관한 상담과 여러 가지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코로나 때문에 집들이를 미뤘는데 결국엔 함께 못해 못내 아쉽다. 아픈 중에도 그녀는 집들이 선물로 주방용품을 보내주었다. 그걸로 요리할 때마다 그녀의 쾌유를 빌고 있다.
살다 보면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잠 못 이룰 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생긴다는 걸 어찌 모를까. 그렇지만 열심히 살아온 그녀에게 닥친 시련이 심하지 않은가. 모든 걸 내려놓고 긍정의 맘으로 희망을 품으면 긴 아픔의 터널도 빠져나오리라 믿고 싶다. 맘속으로 ‘친절한 금자 씨’에게 격려의 말을 보낸다.
‘친절한 금자 씨, 그 암이란 놈을 친구처럼 잘 달래 봐요. 이길 거야.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