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소묘 / 박귀숙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서성이다가는 나도 모르게 KTX를 타고 울산 고향 집으로 달려갔다. 천천히 추억이 어린 집을 둘러본 다음, 뒷산에 올라 할머님과 부모님 산소를 찾아 술을 한 잔씩 올리고 큰절을 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앉아서 고향 집을 내려다봤다.

 

백 년도 더 된, ㄱ자 형태의 남향집이었다. 대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본채가 있고 우측엔 사랑채가 있었다. 본채엔 대청마루가 있어 여름에 뒤쪽 문을 열어 두고 누워 있으면 대숲의 바람이 한결 시원했다. 왼쪽엔 우물이 두 개가 있어, 물동이를 하나씩 들고 모여든 동네 아낙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장독대 옆에는 앵두나무와 대나무 숲이 울창했다. 그리고 외양간에는 누렁소 한 마리가 짤랑짤랑 워낭소리를 내곤 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쿵더쿵쿵더쿵 방아를 찧던 디딜방앗간에서는 우리가 소꿉놀이하며 어른 흉내를 내기도 했다. 담장 밑에서 망초나 봉숭아 잎을 따서는 돌로 짓찧어 반찬을 만들어 감또개를 주워다 그 오목한 곳에 올리고 사금파리 조각은 큰 그릇으로 쓰곤 했다.

마당 한 켠 텃밭에 심은 찰토마토는 간식거리로 좋았다. 쌀장사였던 엄마는 십 리나 되는 어촌으로 쌀과 함께 텃밭에서 뽑은 열무를 리어카에 싣고 가서 팔았다. 그 토마토밭은 셋째 오빠가 숟가락 투정하다 아버지한테 혼나면 숨고는 하던 곳이었다. 오빠 숟가락은 다른 형제와 달리 놋숟가락이었는데 그날 밥상에서는 그게 없다고 투정했다.

봄이면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집 옆 논에서는 개구리도 개굴개굴 울어댔다. 봄에 태어난 나는 뒷산이나 밭둑에 앉아 봄나물과 쑥을 뜯기도 했다. 쑥을 한 소쿠리 뜯어 오면 엄마는 쑥 털털이를 자주 해줬다. 취나물과 원추리, 냉이와 달래는 봄에 입맛 돋우는 데는 제일이었다.

여름이면 아버지는 밭 가장자리의 감나무 위에 원두막을 지어 놓고 우리들이 놀 수 있도록 했다. 하루는 외양간 소죽솥에 불 피워 두고 형제들이 모두 원두막에 가버린 탓에 큰불이 나서 하마터면 외양간의 소를 태울 뻔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여름밤에는 평상에 모여 앉아 마당 한쪽에 모깃불을 피워 두고 감자 한 솥, 노란 술빵 한 소쿠리 옆에 둔 채 이야기꽃을 피웠다. 평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등 별자리 찾기 놀이를 했다. “언니, 저기 국자 모양 북두칠성이 있네.” 별자리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푸르렀던 내 유년은 기억 속에 아련할 뿐이다. 사르륵사르륵 댓바람에 실려 떠났을까.

어릴 때는 겨울 대숲 따뜻한 양지쪽에 앉아 쪼글쪼글하고 달콤한 고욤을 주워 먹곤 했다. 우물우물 고욤을 씹으며 위인전 등 독서에 빠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대나무밭이 없어졌으니 그 많던 고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눈 내리던 날이면 마당에서 강아지와 뛰놀다 눈사람을 만들던 즐거운 추억이 지금도 동화처럼 떠오르는 그 시절이 아련하다. 이제 모두 떠나고 그 그림자들만 아스라이 맴돈다.

잔심부름은 당연히 막내인 내 몫이어서 논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이나 새참 나르는 일을 재미있게 다녔다. 엄마는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나의 단잠을 깨워 낮에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하거나 구멍 난 양말을 꿰매기도 했다. 겨울에는 가을에 창고에 쌓아둔 감을 홍시로 만들어 어촌에 갖다 팔기도 하셨다. 엄마가 주전 마을의 몽돌투성이 길에 리어카로 쌀 배달 갈 때면 엄마처럼 땀을 흘리면서도 뒤에서 힘껏 밀어줬다. 땀을 뻘뻘 흘리며 리어카를 끌고 가던 엄마는 머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며 “숙아, 더운데 아이스께끼 하나 사줄까?” 하면 얼마나 신이 났던지. 그걸 아껴 가며 쪽쪽 빨아 먹던 생각을 하니 그 달콤했던 시절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서울로 이사를 오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엄마, 하고 싶은 말은 입속에서 맴돌다 눈가만 촉촉해졌다.

 

산소에 앉아 잔디를 쓰다듬다 보니 엄마가 묻는 듯하다.

“숙아, 너 잘 살고 있제?”

젖어 드는 두 눈 속에 포근했던 그 시절이 동화처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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