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주름 / 송마나
거실 깊숙이 뜨거운 젊음을 쏟아냈던 빛이 서서히 뒷걸음하고 있다. 오렌지에 연보라가 감도는 빛의 자락을 지그시 밟는다. 오욕을 달관한 선승처럼 석양빛이 흐트러짐 없이 나를 감싸며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피부에 닿는 빛의 체취가 부드럽다. 그 황홀한 빛에게 몸을 맡기면 그는 나를 떠나 베란다 창문 너머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살포시 감은 눈 너머로 불그레한 벌판이 아득하다. 벌판 끝에서 한 여대생이 테니스를 하고 있다.
주먹만 한 공을 따라 이리저리 뛰어오를 때마다 그녀의 짧은 치마가 꽃처럼 활짝 펼쳐졌다. 다리가 훤히 드러난 함박 꽃잎 사이로 속옷이 아슬아슬 보이는 듯했다. 아코디언처럼 펼쳐졌다 오므라드는 주름치마가 용케도 그것을 가려주었다. 심술궂은 태양이 이 풋풋한 묘기를 즐기려고 난폭하게 빛을 쏟아부었다. 그녀는 초록 땀을 흘리며 터져 오르는 청춘의 빛을 치마 주름에 펼쳐 담았다. 치마 주름 속에는 얼마나 찬란한 빛의 화살들이 담겨 있을까. 치마 주름살이 펼쳐질 때마다 그녀와 테니스를 치고 싶어 하는 꽃미남들의 심장 뛰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부서진 밀짚 같은 빛이 거실을 넘어서고 있다.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추억을 부수며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 주름 속으로 처연한 고독이 내려앉는다. 짧은 주름치마를 더는 입을 수 없는 나이에는 얼굴에 주름이 물결치는 것인가.
신은 인간을 만들 때부터 주름이란 변혁을 예정했던 것 같다. 《성경》을 읽으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이 금지했던 열매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꿰매어 앞을 가렸다. 이 꿰매기가 바느질일 텐데,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이 겹쳐진 주름치마를 만들어 입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유혹했던 뱀은 전신이 비늘로 뒤덮여 주름살 하나 없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은 뱀이 알려준 지혜로 몸에 꼭 끼인 옷을 제2의 피부인 양 입었으리라.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윽고 활동하기 편한 헐렁한 옷을 걸치더니, 튀니지 출신의 아제딘 알라이아(1939~)가 주름옷을 창안하여 오늘날에는 패션계까지 열광시키고 있다.
주름이란 ‘Pli’는 단순함(simplicité)과 복잡함(complication)이란 상반된 의미로 조합된 단어다.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주름이 없는 매끈한 얼굴을 지니고, 복잡하고 피폐한 늙은이는 피부가 접혀 주름이 새겨지는 것인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 소설 《연인》은 첫머리에서부터 “열여덟 살부터 스물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메마르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테니스를 쳤던 저 여대생과 같은 나이에 뒤라스는 이미 얼굴에 주름이 졌다는 것이다. 뒤라스는 젊음으로 관능의 꽃이 활짝 피어날수록 얼굴에는 예기치 않게 주름이 깊게 패어갔다. 노인처럼 주름이 자글거리면 퇴락한 여인이고, 아이처럼 주름이 없으면 순수한 영혼을 가졌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며 고뇌했다. 그런 그녀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신비로운 역전을 맞이했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빛이 덧입혀지듯 주름진 얼굴이 젊은 시절의 얼굴보다 아름답게 빛났다.
주름은 각각의 인간,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동물들은 몸에 주름이 잡히거나 피부가 접혀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가죽옷이나 털옷으로 뒤덮여 오직 하나의 종으로서 살아갈 뿐이다. 짐승에게는 머리는 있지만 얼굴은 없다. 머리는 뒤에서도 보이지만 얼굴은 앞에서만 보인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 얼굴에 새겨진 굵고 가는 주름 속에 담긴 내면을 훑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있는 얼굴 주름은 그만의 삶을 보여주는 주체화된 기호인지도 모른다.
내 얼굴 주름은 내가 그렸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풍경화다. 나의 주름은 70여 년의 온갖 삶이 기록된 백과사전이다. 그동안 나는 부채, 우산, 병풍, 텐트를 즐겨 사용했다. 게다가 책은 내 존재의 주름살이 되었다. 녹색 종이 주름을 펼치면 새싹들이 오종종 돋아났고, 갈색 주름을 펼치면 곤충들이 더듬더듬 날개를 펄럭였다. 파란 종이 주름을 펼치면 몇 천 년 이어 내려온 강물이 넘실거렸고, 하얀 주름을 펼치면 허공이 광대무변하게 뻗어 나갔다.
책의 바코드는 우주의 압축된 주름, 내가 책의 주름을 펼쳐 읽을 때마다 문장은 몸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모세 혈관을 타고 머릿골에 주름을 만들었다. 뇌에 쭈글쭈글 주름이 졌다는 것은 책들의 암호를 풀어 그 안의 지식과 지혜를 흡입하고 사탕처럼 빨아먹어 정신이 풍요로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는 것이리라. 이마에 주름이 깊어갈수록 내면의 주름은 빽빽하게 영글어가는 것을. 우주마저도 중력 주름으로 덮여 있다고 하지 않은가.
내 영혼의 굵게 팬 주름에 머물고 있던 희끄무레한 저녁 빛이 사위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