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잎을 밟으며

 

 

 

 

 비가 오고 난 후, 산책로에 배롱나무꽃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꽃잎을 밟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읽은 이종운 작가의 배롱나무 꽃잎에 관한 글이 얼핏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퓨전수필 2024 WINTER에 실린 배롱나무 꽃잎을 쓸며 였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방문을 열고 페디오를 지나면 배롱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껍질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난 연한 갈색 줄기가 매끄럽고 깔끔하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배롱나무가 많다. 거의 꽃잎이 흰색과 보라색인데 배롱나무는 진분홍색 꽃을 피운다. 가지는 풍성하고 화사한 빨간 꽃잎으로 뒤덮여. 주변 수목이 모두 초록이라 한여름 진분홍 꽃나무는 멀리서도 눈에 띈다. 우아하고 기품이 돋보이는 자태가 마치 시집가던 족두리 쓰고 장한 내 누님을 연상케 한다.

 

 배롱나무는 부처과에 속하는 낙엽소교목이다. 특이하게도 뜨거운 한여름에 꽃을 피운다. 아니다. 계속 피운 꽃을 떨어뜨리고 피운다는 맞는 표현일 것이다. 7월부터 9월까지 꽃을 떨어내고 피우는 일을 반복한다. 백일동안 것처럼 보여 백일홍 나무 또는 백일홍이라 부른다. 백일홍의 소리가 변해서 배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번 피운 꽃을 오래 유지하는 한해살이 화초인 백일홍과는 다르다. 최근 한국 원예학회에서는 혼란을 피하고 배롱나무를 아예 백일홍으로, 화초(花草) 백일홍은 백일초라고 이름을 정리했다고 한다.

 

 바로 방문 앞에서 자연의 신비를 체험하며 나는 배롱나무와 친구가 되었다. 벌써 3년이나 되었다. '부귀와 행복', '수다스러움과 웅변', '', '헤어진 벗에게 보내는 마음'이라는 배롱나무의 꽃말도 재미있다. 피고 지 피는 배롱 꽃잎과 어울리는 같다. 재밌는 것은 배롱나무를 '간질 나무', '미끄럼 나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나무의 줄기를 손톱으로 긁으면 간지럼을 타는 나뭇 전체가 하느작거린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의 배롱나무는 너무 미끄러워 원숭이도 매달려 있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긁어보았다. 웬걸, 반응이 없다. 알아보니 한국 충청도 지방의 배롱나무는 간지럼을 탄다고 한다. 모국에 들리게 되면 한번 확인해 볼 일이다. 거운 여름에 꽃을 피우는 배롱은 아마도 기온에 민감한 같다.

 

 배롱나무 꽃잎은 밤낮 가리지 않고 살며시 떨어진다. 이른 아침 산책하러 나가려고 문을 열면 현관과 정원은 이미 떨어진 배롱꽃잎들로 진홍빛 꽃밭이 돼 있. 위에도 마찬가지다. 차마 꽃잎을 밟을 수가 없다. 비를 들어 꽃잎을 쓴다. 그렇게 시작한 꽃잎 쓸기는 하루에도 여러 하게 된다. 어느 이른 아침, 아내가 현관문을 반쯤 비질하는 나를 향하여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요.” 말하고는 피식 웃는다. , 내가 비를 때마다 아내는 쓸지 말라 대신에 조선 시대 이름난 돈암(豚菴) 선우협(鮮于浹) 시를 읊곤 한다.

간밤에 불던 바람 만정도화(滿廷桃花) 지거다.

 아이는 비를 들어 쓸려 하는구나.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요.

 

 나는 들은 계속 꽃잎을 쓸어 담는다. 그루의 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이 이렇게도 많다는 경이롭기만 하다. 놀라는 것은 많은 꽃잎을 날려버리고도 나무는 여전히 꽃잎으로 뒤덮여있다는 것이다. 꽃잎을 탄생시키는 한편, 떨어트리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싶다. 크고 무거운 바위를 끊임없이 정상으로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신으로부터 노여움을 것은 아닐까.

 

 꽃잎은 패디오 테이불 위에도 떨어진다. 거기는 아내가 정성 들여 돌보는 작은 선인장 화분이 이십 개나 놓여있다. 어떤 좋은 꽃잎은 윤기 나는 선인장 잎에 안착한다. 마치 선인장이 피워낸 인양 자연스럽다. 아내는 조심스럽게 싱싱함을 지탱케 양으로 분무기로 물을 뿌린다. 다른 많은 꽃잎은 배롱나무의 밑동이나 정원 바닥에 떨어진다. 한나절도 못돼 말라버린 꽃잎이 애처롭다. 그들 꽃잎은 태어나 살다 모체의 품을 떠나 서로 다른 모양으로 생을 마감한다. 태어나 부모의 보호를 받다 품 안떠나 자기 능력을 다해 살다 저세상으로 떠나는 인간의 모습과도 닮았다.

 

 오늘도 조심스럽게 비질한다. 쓰레받기에 담는다. 배롱나무 밑동 가까있게 해주고 싶다. 물기 잃은 꽃잎은 배롱나무 밑동에서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다. 모체의 뿌리에 닿아 몸이 되어 내년 여름 싱싱한 꽃으로 환생하여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

 

 

 흠결 없는 단정한 글이다.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적인 수필의 미덕을 다 갖추고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 미학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작가들은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쓴다. “배롱나무 꽃잎을 쓸며에서는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가 매우 모범적이다. 더없이 진지하고 성실하다. 심지어 소재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정보마저 전해 준다.(최근 한국 원예학회에서는 혼란을 피하고 배롱나무를 아예 백일홍으로, 화초(花草) 백일홍은 백일초라고 이름을 정리했다고 한다.)

 

 인문적 교양미도 제격이다. 글에 품격을 더하며, 울림에 파동을 오래도록 지속시킨다.

간밤에 불던 바람 만정도화(滿廷桃花) 지거다.

 아이는 비를 들어 쓸려 하는구나.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요.

 꽃잎을 쓰는 행위는 상황 또는 현실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행위리라. 꽃잎을 쓸지 않는 행위는 상황 또는 현실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행위리라. 전자가 화장(火葬)이라면 후자는 풍장(風葬)일까. 생성과 소멸, 유한과 무한, 부정하고 싶은 욕망과 순응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운명, 허무함과 쓸쓸함. 모두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꽃잎을 탄생시키는 한편, 떨어트리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싶다. 크고 무거운 바위를 끊임없이 정상으로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신으로부터 노여움을 것은 아닐까"

 반복적으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시시포스 신화로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시시포스 신화로 환치시키는 철학적 이해와 자기 객관화가 놀랍다.

 

 오늘은 내 사유의 그물망에 이종운 작가의 배롱나무 꽃잎을 쓸며가 올라왔다.

 굳이 아쉬움이 있다면 어휘력과 표현력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어휘력과 표현력은 사고의 깊이와 넓이의 척도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가슴에 새길 일이다. 문학적으로 글은 언어의 집이다. “배롱나무 꽃잎을 쓸며 글집이 아담해서 좋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수작이다. 그의 문운이 왕성하길......

 덕분에 잊고 있던 이형기 시인의 낙화도 읊조렸다.

 

 

                   낙화/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