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가 아닌 것을 찾아서 / 김태길 

 

“인생은 허무하다.”

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라고 우겨대는 것만으로 허무가 달아나지는 않는다.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남이야 믿거나 말거나 나 자신만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근거 비슷한 것이 필요하다.

내가 몸과 마음을 온통 바쳐서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면, 나의 삶은 허무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이 무슨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지나친 추궁이다. 무엇 하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이 열중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우상(偶像) 하나의 존재만으로도 인생은 값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나의 첫째 우상은 어머니였다. 돈을 없애는 데 탁월한 소질을 가지셨던 아버지를 하늘로 받들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도맡은 대들보가 되어 4남매를 키우셨다. 알뜰하고 부지런한 어머니 덕분에 나는 월사금 봉투를 들고 운 적이 없다. 남한강 지류인 달천강 둑을 따라 외가에 가던 길가에서 노파가 파는 홍시를 사 달라고 칭얼댔을 때도 어머니는 내 어리광을 들어 주셨다.

“다시 한번 이런 것 사 달라면 다음부턴 외가에 데려가지 않는다. 알았지?” 다짐을 받으며 염낭 끈을 풀던 어머니의 손끝은 아마 떨렸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어머니를 위하여 좋은 아들이 되리라고 다짐하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아들 노릇인지 별다른 의견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나는 어머니가 가꾸시는 채소밭에서 벌레를 잡기도 하고 돼지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였다. 다리미질을 할 때 옷끝을 잡아드리기도 하고 맷돌을 함께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밖에는 별로 한 일이 없다. 내가 부모의 은혜를 깊이 이해하고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성숙하기 전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중학생 시절에 서상천(徐相天)이라는 역도의 선구자가 나의 우상 명단에 추가된 적이 있다. 내가 그를 만나 본 것은 아니고, 책과 사진으로만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몸집이 깍지동 같은 거구였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서상천은 본래 가냘가냘한 허약 체질이었으나 역도 운동을 열심히 해서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力士)가 되었다.

젓가락보다도 호리호리한 내가 우람한 체구의 장사로 변신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이 신작로처럼 훤하게 내다보였다. 서울 가는 인편에 당장 부탁하여 아령 한 쌍을 구입하였다. 제대로 된 역기(力器)는 너무 비싸서 대용품을 내 손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길이의 쇠 파이프 양단에 쳇바퀴 모양으로 만든 콘크리트 뭉치를 고정시키는 작업은 책 공부보다 훨씬 힘들었다.

아령 체조와 역기 들기를 열심히 하면 곧 알통이 나오고 어깨가 딱 벌어질 줄 알았다. 웃통을 벗고 거울 앞에 서서 매일같이 관찰했으나, 뚜렷한 변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의지가 약간 소침해 있었을 때 어느 친구가 내 꿈과 결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역도 운동 잘못하면 늑막염 걸리기 쉽고, 역도 운동으로 생긴 알통은 풍선의 바람 빠지듯이 오래 가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진정한 친구는 또 한 사람의 나다. ”중학교 때 얻어들은 이 한 마디는 황금보다도 더 귀중한 말씀이었다. ‘여자친구’라는 말은 아직 사전에도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그‘또 한 사람의 나'는 불가불 남자들 가운데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동급생들 가운데서 의기가 투합할 것 같은 사람 하나를 골라서 온통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내가 정성을 다하면 상대편도 그렇게 하리라는 기대는 멀리 빗나갔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우정에 만족할 정도로 나는 후덕한 성격이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의 나’로서의 진정한 친구는 모름지기 이성 가운데서 찾는 것이 순리(順理)라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광명의 길을 낙관한 적도 있다. 이성 간의 우정에는 간혹 문채(文彩) 같은 것이 수반하여 마음의 설렘을 느끼게도 하고, 삶이 허무하지 않다는 증거를 확인한 양 황홀한 순간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문채와 설렘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에서 멈추면 좋지만, 과열로 지나치면 바람을 너무 많이 먹은 풍선처럼 터지고 말리라는 예견(豫見)을 얻게 되었고, 꿈과 현실이 하나가 아님을 새삼 절감하였다.

고무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인의 손놀림을 보았다. 품삯을 받고 하는 일이었지만, 그 무아(無我)의 경지가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돈이나 지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 그 자체를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는 장인의 모습은 더욱 부럽고 더욱 존경스럽다. 속기(俗氣)를 초월하여 창작 또는 봉사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

나도 가끔 일에 몰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잡념을 완전히 벗어난 삼매경은 아니었다. 순간순간 딴 생각이 끼어들었다. 학문을 할 때도 그랬고, 수필을 쓸 때도 그랬다. 도대체 그 ‘딴 생각'의 정체는 무엇일까. 방황도 허무 아닌 것을 찾는 모습의 하나라고 변명하는가. 그러나 그 변명에 무슨 뜻이 있는가. “위로 향하여 몸부림치는 동안 인간은 방황한다”고 말한 것은 괴테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범인의 경지를 괴테의 말에 갖다 붙이는 것은 당치않은 짓이다.

지금 창밖에는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이 작은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삶이 허무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흔적을 찾아서 어느 지점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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