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 / 노장현

 

 

계절이 익어가는 가을 들녘이다. 한낮에는 햇빛으로 따사롭고 저녁이 되면 붉은 빛으로 물든다. 먼 산 그림자가 깊어지면 가을 풍경은 새벽에 핀 서리꽃처럼 사라진다.

여름 폭우로 질펀하던 물기는 청량한 공기 속으로 흙냄새를 품어낸다. 처마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비는 노을빛에 멀리 사라지고 새벽녘의 별은 더욱 빛을 발한다. 산골의 맑은 물은 서서히 잦아지고 산기슭에는 물안개만 자욱하게 피어난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숲의 만상에는 푸른빛이 점점 익어가는 데 들녘에는 풀냄새가 싱그럽다. 이끼와 각종 잎사귀들은 녹색으로 자연을 물들이는데 짙은 그늘은 언제나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활기차고 아름다웠던 가을 숲은 시간 따라 나목으로 외로워지고 마른가지는 휘파람소리를 내며 쓸쓸히 가을을 보낸다.

찬바람이 일면 모든 것이 말라 서로 거칠게 부딪쳐 소리를 낸다. 가을에는 누구든 시들어가는 잎이나 꽃을 바라보며 낙엽과 풀냄새를 한껏 가슴에 품고 마신다. 무겁지 않은 밝고 기쁜 소리를 마음에 그리며 작은 꽃잎을 바라보면서도 무심히 기억의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안부가 그립고 궁금해진다. 햇살이 길게 누운 갈대숲과 고요한 강가의 모래톱과 낯선 길 위에서 바라보는 아쉬운 시간들은 그리움을 자아낸다.

낙엽이 쓸쓸히 흩날리는 오후의 거리를 거닐면 지난날을 회상하게 된다. 내 그리움의 대상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잠시 머릿속에 머물다가 떠나는 동안 문득 기억의 통로가 막히듯 정지된 화면으로 마음을 채운다. 먹먹한 그리움이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여름 막바지 무렵을 생각하며 정말 아름답고 숭고하면서도 덧없는 영상들이 복잡한 머릿속에 떠오른다. 풍만하게 핀 장미꽃들의 아름다운 자태와 겸손하게 피어있는 모습의 달콤한 향기에 취한다.

발걸음 멈추고 보면, 정원에 붉게 열린 먼나무같이 붉은 정열을 발산하는 것은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사랑의 감정으로 몰입하는 것 같다. 가을은 삶의 절정기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영상과 같이 떠오르게 한다. 위험이 있고 성숙한 몸짓으로 풍만한 힘과 사랑을 지닌 삶의 절정에 이른 모습이다. 마치 삶의 덫에서 벗어나 환희의 혈기를 뿜으면서 고요의 세상에 굴복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밤에는 내 서재에 백월白月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창밖 거미줄 사이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가을의 빛깔을 충족시킨다. 아침에는 침묵 속에 잠겨있던 열기를 수증기로 내뿜어 온갖 색채들은 나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게 한다. 나는 이 아름다움이 얼마나 덧없고 빨리 이별을 재촉하는지 아쉽기도 하다. 이 달콤한 성숙함이 얼마나 서서히 시들어 버리는지를 느낀다. 이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보면 탐욕이 구름처럼 가슴에 익어간다.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해서 그 깊은 향기를 간직하고 싶다. 충만한 가을의 심오한 가치를 체험하고 맛보고 즐기고 싶다. 나는 종종 동래금강공원을 찾는다. 그곳에는 지방 문화재 기념물들이 있어 학생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휴식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푸른 솔숲과 자연석들이 어울려 경관이 좋으며 가을에는 진홍색 단풍이 눈과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청설모가 솔숲 사이로 곡예 하는 것을 보면 자연을 실감케 한다. 먼 곳에 가지 않아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온천천의 가을꽃 축제도 볼만하다.

곧 닥칠 겨울에도 가을의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기를 원한다, 나도 가을의 형상을 잡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가을에 화려하게 피었다가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내 곁에 남기고 싶은 생각으로 스케치하고자 하지만 그러기에는 무례함을 알면서 그래도 보석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싶다. 가을에는 만상이 가을의 시녀같이 애잔하고 섬세하고 사치스러운 여인의 자태와 같아 투박한 겨울을 바라보며 성상性相이 바람과 의상으로 가늠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옥같이 졸졸 흐르는 개울 물소리는 백월白月과 함께 먼 산의 푸른빛을 멀리하고 붉은 꽃은 시들어 가지만 애기동백나무와 수선화처럼 강인한 생의 정신으로 혈기를 품는 것이 보기가 좋다. 복잡하고 답답한 희색 담장을 떠나 시각적 풍경을 즐기는 것은 환상을 초월한 황망한 꿈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높이는 야심적 욕망을 충족하는 길이라 하겠다.

동해선을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과 친숙해지는 사람들이 태화강변 생태공원에 많은 종류의 꽃들이 자신들의 향기를 품어내어 사람들 마음의 공간을 만족시킨다. 우리는 반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화답한다. 아름다운 색채를 지닌 가을의 국화꽃은 오색 수를 놓아 산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즐겁게 한다.

강변에 무성하게 피어있는 갈대가 가을바람에 하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며 일렁이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강변은 가을 향취를 맛보는 쉼터로 좋은 곳이리라. 황홀한 낙조로 태화강물에 일렁이는 윤슬은 찬란한 황금빛 화폭으로 눈물겹다.

우리는 떠날 수 없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한 사람도 자연을 이탈해서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냉엄한 존재다. 인간의 아첨도 눈감아주고 때로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베풀기도 한다. 자연은 자신들이 알면서도 한 번쯤 속아 넘어가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더욱 강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때 우리는 어이없는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순환하는 자연 속에 살아가고 있다. 황급히 왔다가 황당하게 간다는 사실이 아쉽다. 잠시 피었다 시들어 죽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면 아쉽기도 하다. 겨울의 길목에서 서리가 잦아 뜰의 버드나무가 시들었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 꽃대가 꺾여 나가기도 한다. 찬바람에 마른 가지를 뒤흔들면 낙엽들은 줄지어 길을 덮는다.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무너져가는 이별이리라.

흰 싸락눈이 분분히 날리는데 새벽하늘의 별도 차가워지는데. 그래도 살아있는 나무뿌리는 잠자지 않을 것이다. 겨울은 가을의 손을 잡고 외롭게 가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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