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악보 / 김은숙

 

때아닌 가을바람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 엎드린 구름이 사납지 않은 걸 보면 지나가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창문을 두들기던 허공의 손들이 나무 우듬지에 자릴 잡았나 보다. 아직은 푸른 잎이 창창한 우듬지가 나선형으로 흔들린다. 그때마다 바람의 음색이 플루트의 투명한 연주로 바뀐다. 가지로 현을 켜는 바람, 전깃줄에 쪼르르 앉은 멧새들도 바람의 악보를 읽은 듯 경쾌하게 재잘댄다. 그러다가도 저들끼리 뭘 안다는 듯 고요한 음표를 찍는다.

바람은 어느새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베란다 건조대를 흔들어댄다. 바람의 지휘에 옷가지가 팔랑댄다. 색색의 무늬가 결을 따라 흐른다. 공중으로 치솟는가 하면 두 팔을 흔들어댄다. 옆의 옷가지를 휘감기도 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탱고를 춘다. 빙빙 도는 바짓가랑이, 나풀나풀 풀어지는 하늘색 원피스, 흰색셔츠는 건조대 귀퉁이까지 밀려나 있다. 수건은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탄다. 한참을 떠들썩하던 바람이 제풀에 지쳤는지 레가토(legato)가 되어 한참을 창가에 머문다.

바람 속에는 익숙한 소리가 스며있다. 부드럽고 잔잔하게, 때로는 열정적이고 강하게 휘몰아치던 소리를 기억한다. 감정이 물결처럼 흐르던 지난날이 있었다. 바이올린의 다양한 음색은 한때 베란다를 꽉 채우고 꿈결인 듯 잠결인 듯 의식 속까지 넘나들었다.

딸이 만들어내던 음은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미세하게 달랐다. 아주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좋아했던 딸은 방학 때면 베란다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연주는 이어졌다. 8시간을 꼼짝 않고 현을 켜던 딸애의 진지한 모습은 한때 나의 기쁨이기도 했다. 바이올린을 켜면 생각이 하나로 모이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던 아이였다.

기타를 오랫동안 연주한 나는 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악기와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의 환희, 아름다운 소리를 만드는 일은 심연을 통과하는 것처럼 소리의 깊이를 헤아리는 일이기도 했다. 딸은 그렇게 하나의 풍경이 되어 결혼 전까지 창밖의 나무와 사물의 귀를 열어놓곤 했다. 그랬던 딸이 좁고 험한 길을 포기한 건 업으로 삼기엔 만만치 않음을 안 때문이었다. 결혼 후 작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지난주, 주말을 맞아 딸이 있는 악기 연습실을 찾은 건 요양병원에 계신 친정엄마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바이올린 조율하는 소리를 오랜만에 들었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며 뜨거워졌다. 무언가에 열중한다는 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비옥하게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준다. 쉬는 시간에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연주자들은 쉬지 않고 음을 조율하고 있었다.

요양병원에서 딸과 나는 엄마의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딸은 유난히 외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 주저 없이 동행을 허락했다. 딸과 엄마, 그리고 내가 얼굴을 마주하자 가족이라는 공통분모 속에 세 개의 현(鉉)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딸이 가방에서 손톱깎이를 꺼내 할머니의 발톱을 깎기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 발톱이 그새 많이 자랐네.”

엄마의 발톱은 무좀으로 두꺼워져 깎기 쉬운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딸은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 할머니 발톱 깎는 일을 도맡았다. 엄마가 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작고 예쁜 손으로 바이올린이나 켜지 무슨 늙은이 발톱을 깎누? 아가, 안 해도 된다.”

“저는 할머니 발톱 깎는 게 젤 재미있어요. 손도 내밀어 보세요. 깎아드릴게요.”

딸은 매우 신중하게 할머니의 손톱까지 깎았다. 그랬다. 발톱이나 손톱을 깎아준다는 건 사랑의 다른 의미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도 딸아이의 발을 당겨 가슴에 안았다. 발톱을 깎기 시작하자 간지러운지 키득키득 웃었다. 엄마도 후렴처럼 허허허 하고 웃었다.

우리는 병실 침대 위에 손을 펼쳐서 마주했다. 여인 삼대의 손은 각자가 걸어온 세월이나 삶의 무게만큼 같으면서도 달라 보였다. 서로의 손을 보며 지난날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일에 익숙했던 엄마 손은 투박하고 바이올린을 만진 딸의 손은 길고 예뻤다. 우리는 때로 피아노 삼중주처럼 인생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고 독주도 하면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헤쳐왔고 또 헤쳐갈 것이다.

엄마는 구순이 가까워지자 병원을 집처럼 자주 드나드신다. 어느새 나는 낀 세대로 챙겨야 할 일이 많은 중심에 서 있다. 딸은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고 미래를 다지기 위해 바쁘다. 같은 시간이지만 느끼는 속도는 각자 다르다. 딸에게는 보편적인 속도로, 나에게는 붙잡고 싶은 속도로 인지된다. 엄마에게는 어제와 오늘이 너무나 다른 무늬로 채워지지 않을까 싶다.

부쩍 왜소해진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바깥나들이에 나섰다. 건널목을 지나 원내 정원으로 향했다. 야윈 엄마를 일으켜 스웨터를 입히고 머플러를 둘러드렸다. 병상에서 두 번째 계절을 맞는 엄마 마음은 어떠실까. 우리 사이에 아주 잠시 눅눅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조금씩 닮아가는 우리는 각자 세월의 징검다리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화로운 세 개의 화음처럼, 비슷한 듯 다른 서로의 손을 포개고 <섬집 아기>를 불렀다. 연습하지 않아도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화음은 자연스러웠다. 호숫가 벤치에 앉은 세 그림자, 연못에 바람이 일어 잔물결이 안단테(andante)로 반짝였다. 호수 건너편 사내아이가 수면 위로 먹이를 던졌다. 잉어가 스타카토(Staccato)처럼 톡, 톡, 튀어 올랐다. 수면이 둥글게 파문을 일으키며 서로 스며들었다. 늘임표를 상징하는 반원 모양의 페르마타(Fermata)가 생각났다.

잉어의 입이 수면 밖으로 쉴 새 없이 뻐끔거리는 걸 우리는 바라보았다. 주둥이로 물을 뿜어대는 소리가 바이올린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피치카토(Pizzicato)같았다. 엄마의 등이, 딸아이의 어깨가 동글동글 맞닿아 있는 걸 바라보며 나는 그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어느새 바람은 베란다에 흔적만 남겨놓은 채 사라져버렸다. 문득, 딸아이의 바이올린 연주가 듣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이, 말간 하늘에 음표 세 개가 나란히 손을 맞잡고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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