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던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 신 재 기
코로나로 문을 닫았던 동네 목욕탕이 2년 반 만에 개장했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헬스와 이발을 해왔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목욕탕이 폐장하는 동안 머리를 깎으려고 동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에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발사가 바뀌었다. 새로 온 이발사 K는 이전에 시내 어느 호텔 이용소를 경영했는데 코로나 여파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K한테 한 달에 한 번꼴로 머리를 깎고 염색했다. 그의 손놀림이 시원시원했다. 이발하고 염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금방이었다. 꼼꼼하게 살피면서 오래 가위를 들고 있는 이발사보다는 빠른 시간에 일을 마치는 K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런 호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 목욕탕 사장을 향한 불평불만을 쉼 없이 늘어놓았다. 코로나 직후라 손님도 눈에 띄게 뜸하고 사장에 대한 나쁜 평판을 익히 들은 터라 그의 불평에 얼마간 맞장구를 쳤다. 내 맞장구를 따라 그의 불평불만은 강도를 더해 욕설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불평을 반복해 듣다 보니 마음이 불편하고 그가 싫어졌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일을 꼼꼼히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염색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곳곳에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내가 이발한 내 모습을 보고 좌우 짝이 진다고 말한 때도 있었다. 그는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의 불평은 특정한 문제를 벗어나 매사에 습관적으로 뒤따랐다. 부정적인 시선과 비판적 언사가 몸에 배어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보다는 밖에서 찾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K가 떠나고 그 자리에 이발사 P가 왔다. P는 나이가 칠십이 넘었다. 머리도 백발이었다. 한 달 임시로 있다가 상황을 보고 계약을 하겠다더니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운전면허증을 반납한 처지라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고 출퇴근한다고 했다. 코로나 전에 이미 은퇴했는데 다시 일하게 되어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면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해 주면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손자들 용돈 줄 돈만 벌면 된다며 항상 싱글벙글하였다. 이발소 운영에 별 욕심이 없다고 말했다. 마주치는 손님들에게 항상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일을 하는 데 세심했고 정성을 쏟았다. 이발을 해 보면 그가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P만큼 만족감을 준 이발사는 없었던 것 같았다. 손님이 많냐고 물으면 단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말로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발소에 손님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무관한 나도 기분이 좋았다.
두 이발사를 겪으면서 자문해 보았다. 나는 두 인물 유형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게추가 전자 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하는 일에 불성실했던 것은 아니지만, 매사를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주 비판과 불만을 앞세웠던 것 같다. 분명 주어진 것에 별로 만족할 줄 몰랐다. 현 사태를 편안히 관망하지 못하고 새로운 국면 전환을 서둘렀다. 산 너머 보이지도 않는 추상적인 이상을 좇아 경사 급한 산을 오르느라 늘 숨이 가빴다.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에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놓치고는 금방 후회하곤 했다. 이러한 성격 탓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때도 있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되었지만, 지난 40, 50대가 그랬다. 그렇게 발을 땅에 제대로 딛지도 못하고 공중을 배회하면서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10여 년 전 《수필미학》을 창간하여 오늘까지 발간하고 있다. 시작할 때는 나름대로 원대한 뜻을 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상치 못했던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나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만만찮았다. 현실적인 문제의 무게가 무거워지자, 처음 지녔던 뜻이나 목표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잘못 시작했다는 후회가 고개를 쳐들며 마음의 균형감각을 잃어갔다. 사람들 앞에서 짜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툭하면 불평불만을 터트렸다. 대부분의 불평불만은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는 데서 시작되었다. 종국에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뱉고 말았다. “그만두어야겠다, 문 닫으면 그만이다, 10년만 하고 끝내겠다” 등의 막말을 수시로 흐렸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뜻이 있어 내 스스로 시작한 일을 두고 이런 태도를 보였으니 주위 사람들이 나한테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지켜보던 어느 지인이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그만둔다는 말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놓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인품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를 계기로 자성하며 마음을 고쳐먹고《수필미학》발행을 12년째 이어오고 있다.
사실 진중하지 못하고 속 좁은 내 성격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 곁을 많이 떠났다. 마음의 그릇이 작아 품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했던 지난날의 태도를 자책한다. 이제 현실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명쾌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는다. 손해 보는 것이 뻔한데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다소 모자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똑똑한 사람보다는 무던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