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의 미학/ 정은실
딸아이가 분가하고 나니 드레스 룸이 휑하다. 오랜만에 내 차지가 된 드레스 룸에 조립식 서랍과 선반을 들여놓고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넣었다.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은 따로 모아놓고 옷걸이에 걸어 놓을 옷부터 걸다 보니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옷도 더러 보인다. 티셔츠 등 접는 옷들은 조립식 서랍에, 모자와 가방 등 액세서리는 선반에, 비치해 놓았다. 정리하다 보니 빼꼭하게 들어찬 옷들로 숨이 턱 막힌다. 그러다가 한쪽에 덩그러니 비어 있는 자리에 눈길이 가 한참을 그 구석에 머물다 왔다.
어머니 생전, 나는 창문이 없는 것만 제외하곤 기도실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드레스 룸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어했다. 그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최애의 장소’가 되었다. 들어가서 패션쇼를 하듯 옷을 입고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던 곳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울적할 때면 옷들의 위치를 바꿔보기도 하고 날씨가 끄물거릴 때면 입을 옷이 없다고 괜한 옷을 타박하며 한참을 그곳에 머물다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보이질 않는다. 이리저리 찾아봐도 없다. 소리 내 이름을 부르니 개 짖는 소리는 들리는데 마치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느다란 소리로 컹컹 짖는다.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발길을 옮기니 드레스 룸이다. 구석, 그 후미진 곳에 쭈그리고 앉자 잠을 잔 모양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은 어둡고 고요하니 그놈도 놀랐던 모양이다. 맥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 후부터 구석은 강아지의 아지트가 됐다. 남편과 나는 놈이 사라지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드레스 룸 구석부터 찾게 된다.
얼마나 편하면 구석에 한참을 앉아있다 잠이 들었을까.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충동에 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낮은 자세로 앉아있다 보니 옆과 위, 정 중앙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가운데서는 구석이 눈에 띄지 않겠지만 구석에서는 모든 곳이 일목요연하게 잘 보였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던 가로와 세로가 만나 합일점을 이룬 곳. 구석은 나란히 가는 평행선으로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 곳. 후미진 구석, 음습한 구석 등등, 구석에 붙은 부사나 형용사로 미루어 봐도 구석은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곳이다. 또한 누구든지 정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를 원하지 결코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석에 한번 앉아보면 이곳이 얼마나 편안한지, 고스란히 앉아 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육십 줄에 들어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내 삶에도 구석이 많았다. 부부사이에도 의견 대립이 생길 때마다 조율하지 못하고 바로 가타부타 다투곤 했었다. 점점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해결하지 않은 채로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기 시작했다. 그리곤 가운데부터 처리하고 난 후 그대로 방치한 줄 알았던 구석은 둘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어 남편과 나를 받쳐주고 있었다. 마치 탄탄하게 잘 쌓은 건물의 벽돌처럼 말이다. 구석의 벽돌 하나만 어그러져도 전체가 흔들리 듯, 구석이 주는 의미가 크다. 구석이 있기에 중앙이 존재하듯 가운데 우뚝 선 한명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구석에서 남모르게 힘을 합쳐 온 수많은 민초들이 있다.
언젠가 뉴욕시 광장의 역사를 공부하다가‘워싱턴스퀘어’,‘유니온스퀘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부러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릴정책에 의해 도시구획을 하고 보니 구획 전에 존재했던 브로드웨이와 바둑판 모양의 그릴 사이에 구석이 생기게 됐던 것이다. 그 당시 브로드웨이는 똑바른 길이 아니고 비뚤비뚤한 길이었고, 뉴욕 주민들은 이를 없애 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양대로 광장을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마침내 뉴욕의 명소가 되었다. 구석에서 시작한 도심의 오아시스 광장에서 사람들은 쉼을 얻고 목을 축이고 하루의 노고를 달랜다.
드레스 룸 구석의 먼지를 닦으며 생각한다. 누군가 중앙에서 피어날 아름다운 꽃이 되길 원한다면 기꺼이 나는 구석을 마다하지 않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