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그 암자 / 박영수
속리산 영봉 서쪽 끝에 묘봉이 있다.
문장대의 동생 격인데 그리 높지도 않으면서 산세가 험준하고 주능선 일대가 온통 기암괴석으로 덮여 있어 이름 그대로 묘한 맛을 풍긴다.
이 산을 처음 찾았던 날, 나는 황토빛이 오른 수백 년 묵은 노송에 반했고, 조물주의 마지막 손길이 닿은 듯 흰구름 위에 떠 있는 정상 암봉에 매료당했다.
산 북편인 용화에서 올라가는데 바위가 병풍을 친 듯 가까이 다가갈수록 잘 그려진 산수화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계곡 물길을 따라 길이 이어져 간간이 좌우로 건너뛰어야 했고, 진달래, 조릿대, 싸리나무가 엉켜 길을 덮고 있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나뭇가지를 헤치고 올라가야 했다. 어느새 도란대던 물소리마저 끊기고 낙엽이 무릎까지 빠지는 가파른 비탈길에 이르렀다.
문장대에서 오는 길과 연한 주능선길에 올라 잠시 땀을 식힌 뒤 오른쪽 길로 접어드니 군락을 이룬 노송지대, 이윽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묘봉 정상이 나타났다. 온통 바위 천지였다. 짙푸른 이끼와 석이버섯이 솔내음과 어우러져 독특한 향내를 풍겼다. 8백미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시원했다.
이날 우리는 정상 부근의 넓적바위에서 점심을 들고 오후 3시경 올라온 반대편인 법주사 쪽 길로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편안했다. 얼마쯤 내려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같이 오던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앞서 온 듯도 싶고 혼자 뒤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때 시야가 트이면서 왼편 산기슭으로 기와집 모서리가 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렸다. 암자가 분명했다. 환상에 이끌리듯 다가가는데 어디선가 본 듯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분명 와 본 곳이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신혼여행을 왔던 여적암, 내가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절의 반대편에서 산을 넘어 온 때문이다.
아내와 첫날밤을 보낸 암자 건물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다 못해 퇴락해진 채 무성한 잡초들만이 애워싸고 있었다. 거기 내 젊은 날의 잔영이 묻어 있는 듯 눈에 잡혔다. 마음이 훨훨 30년 전으로 날아가는 듯했다.
꽃향기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신부의 손을 잡고 속리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당시엔 경주 불국사나 온양온천을 선호하던 시절이었으나 산을 좋아하던 나는 속리산 여행을 택했다. 아침 일찍 떠나와 법주사 경내를 돌며 사진을 찍다가 문득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여관촌에서 신혼의 첫밤을 보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만 같아 생각해낸 것이 법주사의 말사인 여적암이었다.
나는 신부에게 간곡히 청했다.
“이 수정봉을 넘어가면 대학 다닐 때 이태 여름을 보낸 민판동이 있고, 그 위쪽에 여적암이 있는데, 조용한 곳이니 거기 가서 묵고 오는 게 어떻겠는가.”
매우 어처구니없는 즉흥 제의였지만, 신부는 망설이다가 기꺼이 내 뜻을 따라주었다. 수정봉을 넘어 여적암까지 가는 동안 가시덩굴에 걸려 옷이 찢어지기도 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신록 속의 여적암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마침 새 법당을 준공한 직후라 동네 아낙들까지 와 북적였다. 뜻밖에 들이닥친 신혼부부를 맞는 절 사람들은 반색을 했다.
“아니, 새색시가 워떻게 왔댜?”
“경사났네!”
“어서 올라 와, 인사부터 드려.”
한 아주머니가 먼길 오느라 시장하겠다며 점심을 차려다 주었다. 내가 하룻밤 묵고 싶다고 청하자 대환영이었다. 여적암은 비구니들만 있는 암자였는데 주지스님이 그동안 법당으로 써오던 낡은 암자를 신혼방으로 내주셨다. 바로 대학 시절 본 암자의 본채였다.
신부는 산을 넘어오느라 발까지 부르텄으나 절 사람들의 진솔한 환대에 고단함도, 녹아버린 듯 화안한 표정이 되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아래쪽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방 가득 경건함이 느껴져 함부로 범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안내해준 아주머니가 ‘좋은 꿈 꾸라.’고 신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신혼의 단꿈을 꿀 수 있었다. 그 후 여적암은 바쁜 일상에 묻히고 말았다.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옷깃을 여민다. 30년 세월이 흘렀는데 내가 그동안 무얼 하고 살았는가, 회한이 가슴을 저며온다. 밖으로 나오자 초로의 비구니 한 분이 정좌하고 있다가 묘봉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이냐고 기척을 했다. 나는 옛날 민판동에서 여름을 지낸 이야기며, 아래 절에서 첫날 밤을 묵은 사연까지를 털어 놓았다. 스님은 다소 놀라는 기색으로 머리를 주억이며 먼 하늘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첫날 밤 이야기 알고 있지요.”
“네?”
“아래 절에서 부처님을 옮겨 모시던 날, 신혼부부 이야기가 나왔는데 주지스님께 축복을 받았을 거라고, 부처님의 가피가 계실 거라고 축원하셨습니다.”
아아, 그랬던가. 내가 잊고 살아온 동안에도 이 절에서는 우리 부부를 잊지 않고 축원을 해 주었던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절에서 내려간 열달 뒤, 손 귀한 우리 집에 득남의 경사가 났고, 그 애가 두 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할 위기를 모면했던 일. 누가 시킨 바도 없는데 고교시절부터 불교학생회에 열심히 나가던 일들이 모두 예사롭지 않게 생각이 되었다.
30년 전 암자에서의 신혼 첫날밤이 축복이 되어 오늘에까지 큰 인연으로 살아있는 것일까.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내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절 쪽으로 방향을 트는 나를 보고 뒤따라온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묘봉을 오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내려올 때는 꼭 여적암을 들렀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아내와 함께 법주사에 등을 밝히고 이곳을 찾았다. 이제 민판동 쪽에서 오르는 길은 암자 입구까지 잘 닦여져 있다. 단지 하룻밤 묵고 간 이름도 모르는 신혼부부를 축원해 주셨던 주지스님은 오래전 큰스님으로 불리다가 열반을 하셨다고 한다.
올해는 사월 초파일을 며칠 앞둔 주말에 다녀왔다. 우리 내외가 법당에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오자 뜻밖에 비구스님 한 분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 스님께 비구니 스님들이 보이지 않은 것을 궁금해하자 암자를 중수할 계획이라고만 밝히셨다. 스님은 초면의 방문객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지만, 옛날 사연은 묻어 두기로 했다. 암자의 푸른 빛과 묘봉에 솟은 바위에서 무언의 가르침을 스스로 깨닫고 싶었다. 쓰러질 듯 퇴락해 있던 아래 절은 몰라보게 단장이 되어, 고시 준비생들의 공부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여적암에서 내려오는 길에 “부처님 가피가 계셨을 거라는 말씀은 노스님의 덕담 아니었을까?” 자문하듯 한마디 하니 아내는 “자비심을 가꾸라시는 부처님 뜻을 전한 게 아닐까요?” 했다.
‘의심하는 만큼 깨달음이 있다.’고 했던가. ‘믿으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옛날 본 것과 다르니라.’ 했던가.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산새 지저귀는 청아한 소리가 귀를 맑게 씻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