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을 거닐며/ 이형숙
겨울과 봄이 뒤섞이는 2월, 대숲에는 진초록 향기만 고여 있는 게 아니었다. 바람이 데려온 봄 향기와 우듬지에 모인 댓잎들이 볼을 비벼대는 소리로 가득하다. 투명한 바람조차 초록빛이다. 바깥은 봄을 부르는 햇볕이 따뜻한데, 초겨울 같은 싸늘함이 온몸을 감싼다. 이 푸르고 맑은 숲에서 어깨를 누르던 상념들을 내려놓지 못할 이유가 없을 듯하다.
높이 솟은 푸른 대나무들이 이방인을 무심히 내려다본다. 나무의 생이 그랬던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빈 가슴에 욱여넣는다. 어떤 이는 나무라 말하고 어떤 이는 풀이라 말하는 대나무, 풀과 나무의 경계에 서서 두 개의 생존방식으로 살아간다. 등나무나 칡처럼 기댈 곳을 찾지 않는다. 가느다란 몸으로 홀로 서서 사색할 뿐, 마디를 딛고 올라서며 자랄수록 단단해지지만 거대한 몸집으로 살기를 포기한 풀이다.
나무라고 이름 지어 부르지만, 턱밑에 쌓아놓은 나이테도 없다. 그 자리는 늘 비워두었다.
마디 굵은 나무에 가만히 기대어 본다. 수척한 초록이 차갑게 다가온다. 그 체온이 가까이할 수 없는 서늘함이다.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거부하는 몸짓인가, 내 존재는 자꾸만 작아진다. 지난날 선인들의 처절했던 역사 속 이야기가 머리를 스친다. 오래전 이곳은 생과 사가 뒤엉키며 나라의 운명을 재단해 내던 전장이었다. 소용돌이치던 시대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선인들의 삶은 부러질지언정휘어지지 않는 대쪽 같은 절개와 충절이었음을 되새겨 본다.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오를 수 있음은 오로지 성장과 멈춤을 반복하면서 내딛는 마디의 힘이다. 뼈가 맞닿는 아픔을 견뎌낸 후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며 조금씩 성장한다. 돌아보면 크고 작은 내 인생의 마디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상처였음을 깨닫는다. 지나간 날 머리를 맞대고 꿈을 향해 함께 달렸던 친구는 믿음과 신뢰로 맺어진 기둥과도 같은 존재였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감당해 낼 수 없는 폭풍이 불었다. 친구의 배신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설레던 나를 뿌리째 흔들어 버렸다. 온몸으로로 맞서도 버텨낼 수 없는 폭풍이었다. 차곡차곡 준비해 둔 것 다 잃어버리고 좌절감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뉴월 땡볕보다 더한 분노와 원망에 가슴은 들끓었다. 용서할 수 없는 배신감에 수많은 밤을 지새웠고 출구 없는 감옥에 갇힌 듯 숨이 막혔다.
거센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다행히 삶의 본능처럼 뿌리가 더 깊이 박혀 있었다. 뿌리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새 가지도 돋아났다. 원망보다는 내 부족함을 탓하며 마음속 집을 고치고 또 고쳐지었다. 울컥대던 마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내 안의 찌꺼기를 펴내 버린 후에야 달라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상처는 가끔 가슴을 아프게 후비곤 하지만 불에 단련된 쇠가 강해지듯 통증을 잠재우고 파도가 가라앉기를 차분히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돌아보면 내게 시련은 삶의 마디였다. 대나무가 마디를 딛고 자라듯 아픔을 딛고 성장했던 값진 시간이었다고 믿는다. 지금은 낯선 길 위에 서 있어도 지나간 시간을 반추해 보며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마른 땅 위로 드러난 뿌리가 밟힌다. 건강한 남자의 팔뚝에 드러난 힘줄 같기도 하고 낭만과 현실 사이를 잇는 밧줄 같기도 하다. 어쩌면 사는 동안 움켜쥐고 놓지 못한 한 가닥 동아줄 같기도 하다. 뿌리는 땅속 깊은 곳으로 또 옆으로 힘차게 뻗어나가 나무가 흔들림 없이 서있을 수 있게 힘을 더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저 높은 곳에 가닿기를 뿌리는 간절히 기원했을 터이다. 반듯하게 자라 언제까지나 푸르게 푸르게 서 있기를 기원하는 뿌리의 염원이 담겨 있다.
대나무는 생의 긴 여정이 다할 즈음 단 한 번 꽃을 피운다. 빈 몸으로 소멸의 순간을 맞는 대나무의 살아온 날들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주어진 모든 순간을 마지막인 듯 살다가 자신의 지나온 날을 돌아볼 수 있게 몸소 일러주는 듯하다. 영원한 이별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생의 마지막 꽃을 피워 이별식을 치를 수 있다면 보내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슬프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죽음도 이별과 소멸이 아니라 애틋한 추억으로 남는 이별식이었으면 좋겠다. 여행을 떠나듯 슬프지 않게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오늘 하루 대숲이 내게 건네주던 소중한 말들을 마음속 깊이 뿌리내릴 수 있게 심어 놓으려 한다. 내 마음 머무는 곳마다 손잡아 이끌어줄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며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말없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욕망과 이기심으로 비틀거릴 때 대나무의 푸르름과 그 서늘함으로 나를 흔들어 깨울 것이다. 광대한 우주에 먼지보다 못한 존재임을 일깨우며 차분한 스승처럼 조용히 토닥여 주기도 하리라. 내려놓지 못한 욕망으로 판단이 흐려질 때면 호된 죽비로 어깨를 내려치기도 할 것이다. 작은 일에 마음을 다치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서릿발 같은 위엄으로 나무라기도 하리라.
산 아래 줄지어 선 대나무숲이 파란 하늘과 구름과 길을 배경 삼아 커다랗게 수채화를 그려놓았다. 걷고 쉬고 사색하며 또다시 걷던 대숲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선다. 대나무가 건네주던 말들을 가슴에 담고 되새겨 보는 시간,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마음에 흐르는 강이 조금이나마 넓어지고 깊어졌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