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법 / 강천

 

 

심악한 바람이 북극 한파를 데려와 온 세상을 다시 꽁꽁 얼려놓았다. 입춘 후 나흘간이었다. 큰 추위는 지났을 거라고 은근히 방심하던 터라 더욱 모질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내리 사흘을 또 봄인 듯 포근하다.

동백이 보고 싶었다. 산중 백련사에서 보살님의 미소처럼 말간 웃음을 머금고 있을 그 동백 말이다. 한번 마음이 동하면 안달복달 몸이 견디지 못하는 이놈의 조급증. 속내 모르는 문우들을 부추겨 오백 리 길 꽃구경에 나섰다.

겨울 동백 숲은 여전히 검푸르고 산새들의 날갯짓 역시 변함없이 분주하다. 나무마다에는 봄을 야무지게 사려 쥔 꽃망울의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오종종히 매달려 있다. 빼꼼, 꽃잎을 내밀다 꿈이 시꺼멓게 얼어버린 봉오리 앞에 서 있다. 채 피어보지도 못한 넋이 차마 떠날 수 없었는지 가지 끝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 섣불리 세상 구경을 하려던 탓이었던가. 계절을 오판한 대가인가. 먼저 망울을 터뜨린 녀석은 송이째 갈색으로 말라 버렸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지독한 추위에 냉해를 입어 버린 것이다. 그런 주검을 너나없이 두어 송아리씩 멍멍히 보듬고 있다.

볕바른 언덕바지에서 꽃잎이 열려 있는 동백을 만났다. 어찌어찌 피기는 하였으나 끝동이 절반쯤 뭉그러져 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꽃이파리도 폭탄 맞은 자국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다. 살아남았으되 온전하지 못한 꽃. 붉은 열정에 새겨진 상흔을 잎사귀 틈으로 비껴든 햇살 한 줌에 말리고 있다.

무엇 하러 이 추위에 꾸역꾸역 밖으로 나와서는 불상사를 자초했을까. 온 세상의 봄꽃들이 아직 아린 속에 움츠려 겨울잠을 자고 있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한두 해도 아니다. 얼어붙고 상처 입어 가면서도 기어이 터져 나오려는 저 고집 끝에 무엇이 있을지 헤아려 본다. 나 홀로 고고하다는 특별한 삶에 대한 자부일까, 남들보다 먼저 나서서 도드라지고 싶은 계산속일까. 그도 아니라면 ‘나는 동백’이라는 강박이었을 수도 있겠다. 살아가자면 왜 그런 게 있지 않은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는, 싫어도 해야만 하는.

활짝 웃는 동백을 보며 위안을 얻으러 왔다가 짓물러진 꽃을 보고는 가슴만 미어진다. 왜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흐드러지게 피우지 않느냐고 괜스레 꽃에다 타박을 놓는다. 내 안타까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지르르한 잎들은 태평스럽기만 하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 시큰둥하다.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딴전이다. 면면부절이라 동백이지 십일홍이 무슨 동백이냐고 오히려 면박이라도 하는 듯 당당하다. 하 많은 사람 중에서도 너는 너대로의 삶이 따로 있지 않으냐고.

찬바람 들 때부터 봄바람 질 때까지 끊임없이 피고 짐을 반복하는 삶이다. 매화처럼, 개나리처럼 가슴 터질 듯 머금고 있다가 한꺼번에 몽우리를 열어젖히면 얼마나 통쾌할까. 수백 년 대를 이어 붙박이로 살아온 동백이 어디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겠는가만.

때에 맞춰 피는 목련은 봄추위 한 번에 일 년 농사를 몽땅 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는 동백은 몇 송이 꽃의 희생으로 재난을 피해 간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기후를 두고 도박하기보다는 겨끔내기로 끊임없이 피고 지는 전술. 게다가 먹을거리가 귀한 계절이기에 동박새를 독차지할 수도 있으니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는 뜻도 있을 터. 눈보라 맞으며 체득한 그들만의 생존 방편이 아니겠는가.

누가 반쯤이나 뭉그러진 이 꽃을 보고 얄궂다 허물할 수 있으랴. 살아내려 애썼던 몸부림의 흔적임을 알진대. 사람의 마음으로 슬퍼하거나 애달파할 일도 아니다. 동백이 살아가는 그들만의 방법일 뿐이니. 삶이란 자기와의 끊임없는 투쟁. 자기를 극복한 자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늘의 시샘을 받아 기형으로 피어나 버린 한 송이 꽃. 불굴한 이 삶의 승자에 경의를 올린다.

삼동설한 붉디붉은 동백이 어디 나 보기 좋으라고 피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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