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 맹난자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다.

누에가 뽕잎을 먹어야 비단실을 뽑아낼 수 있듯이 읽지 않은 작가는 병든 누에처럼 튼실한 고치 집을 지을 수 없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서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밝혔다. 《우파니샤드》, 플라톤, 칸트가 없었다면 나의 학문은 없었을 것이라고.

범아일여 사상의 ‘우파니샤드’ 철학은 모든 종교적 신앙의 원천이라고 말한 이는 올더스 헉슬리였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는 인도의 승려 프로히트 스와미를 만나 《우파니샤드》를 영역하고 상대성과 분별심을 뛰어넘는 니르바나의 성취로 존재의 통일을 깨닫는 《비전》을 쓸 수 있었다.

문학작품이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조립하는 것에 불과하다던 롤랑 바르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정신사는 역사를 무시할 수 없으며 선배의 족적을 답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위에 벽돌 한 장을 올려놓는 것이 작가가 아닌가.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는 3000년 뒤 제임스 조이스에 의해 《율리시즈》로 재탄생하고, 5천 년 전, 중국의 ‘주역’이 노자에 의해 《도덕경》으로 갈음된다. 헤르만 헤세는 주역과 노장사상을 뼈대로 《유리알 유희》라는 명작을 써냈다.

 

작가는 모름지기 오래 살아야 만성晩成한다. 충분한 일조량과 풍우를 거쳐 과육이 감미甘味를 성成하듯 작가들에게도 오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세월의 풍파를 거쳐 그들은 증언하고 역사적 사명감으로 대안을 제시해왔다. 허균은 홍길동을 내세워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고 이상 국가 율도국을 세웠으며, 헤르만 헤세는 세계대전을 겪은 후 《유리알 유희》에서 이상 국가로서의 학자국學者國 카스타리엔을 제시하고 인간의 영성과 진리, 명상 등을 강조하였다.

일본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에 유학 중이던 노신은 중국 사회를 개혁하는 데 의학이란 그리 긴요한 것이 못 된다며 문학으로 뜻을 바꾸었다.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문학밖에 없다면서 《광인일기》와 《아Q정전》 같은 걸작을 써서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민족의 정신 개조와 각성을 촉구하는 데 앞장섰다. 노신은 소설 속에서 “앞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이 버젓이 살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 세계는 진정한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그는 “젊은 후진들이 사다리를 밟고 더 높이 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야 아무리 밟힌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며 청년교육에 힘썼다. 그의 유해가 만국공묘에 묻힐 때 흰 천에 ‘민족혼’이라 쓴 만장이 영구를 덮었다.

빅토르 위고는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코민의 반역자들과 유태인들을 탄압과 박해로부터 보호하고 이들을 위해 시를 쓰고 극장에서 목소리 높혀 외치기까지 했다. 그를 가리켜 ‘프랑스의 톨스토이’라고 말한 사람은 작가 로맹 롤랑이었다. 위고와 톨스토이는 80이 넘는 장수를 누리면서 자기 내부의 선善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자국을 대표하는 문호로서 톨스토이는 《부활》로, 위고는 《레미제라블》로, 자신의 인도주의 사상을 남김없이 선양하였다. 왕성한 정력으로 많은 염문을 뿌린 것조차 비슷했다. 장발장의 뒤를 밟던 자베르는 장발장의 고결한 마음씨에 감동하고는 그를 체포할 수가 없었다. 직무와 인정의 틈바구니에 끼인 형사는 번민 끝에 투신자살로 관계를 청산한다. 세상에 절대적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위고의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프랑스 정부는 위고를 국장國葬으로 예우했다.

젊은 시절, 방탕과 도박, 간음과 성병, 낙제, 허영심으로 가득 찬 톨스토이는 일기장에 자신의 과오를 면밀히 분석해 적었다. 그의 인생 40년이 인간적인 본분을 만드는 기간이었다면 나머지 40년은 그것을 개선해 나가는 데 바쳐진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을 쓴 것은 72세였으나 이 작품의 정신적 배경은 50세에 쓰기 시작한 《참회록》에 그 연원을 둔다. 노벨상이 결정되었지만 대중과 함께가 아닌 혼자만 받는 상은…, 하면서 그 상마저 거절해버렸다. 많은 사람이 추종하며 성자처럼 떠받들자 “나는 성인이 아닙니다. 성인인 척한 일도 없습니다. (…) 나를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준다면 그것이 사실 나의 본 모습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구나!” 막심 고리키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문학적인 근본 질문에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것을 문학은 가능하게 한다. 톨스토이의 답안이다. “인간의 구원은 자아를 버리고 스스로를 희생시키며 신의 말씀에 따르는 데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작가일기》에서 “우리들이 저 사람과 똑같은 입장에 놓인다면 아마도 우리는 저 사람보다 더 나쁜 짓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무죄로 해주어야겠어.”라고 말한다. 《악령》에서 스테판이 임종 직전에 한 말도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서 죄를 지었다.”였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조시마가 죽어가는 형에게 한 말도 이것이었다. 작가가 우리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죄’ ‘용서’ 이것이었을 것이다. ‘죄를 거쳐 예수로’ D‧H 로렌스의 말대로 그는 거기까지 도달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작가 정신, 그것은 글을 쓰면서, 쓰는 동안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처럼 스스로 내면의 성지聖地를 이룩해가는 도정道程이 아닐까 싶다.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는 그가 《페스트》를 발표하자 ‘신神 없는 성자’ 덕망 있는 무신론적 성자聖者로 평가했다.

“그렇다면 난 지옥엘 가겠어”라며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인류애를 일깨운 마크 트웨인, 친한 작가로 알려진 일본의 오에 겐자브로는 천황제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반전 반핵과 인류의 공존을 역설한 평화주의자다

우리를 개안開眼으로 이끈 인생의 달관자, 도연명, 몽테뉴, 셰익스피어, 임어당, 괴테, 헤세, 사뮈엘 베케트… 등 그분들의 영전에 삼가 존경의 염念을 바친다.

작가는 시대의 등불이며, 중생구제를 서원하는 관음보살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들의 연민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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