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가 품은 우주 / 이방주
새벽 산책길에서 딱한 중생을 만났다. 젓가락으로 입에 올리다 흘린 자장면사리 같다. 꿈틀꿈틀 힘겹게 기어간다.
지난 밤 폭우에 땅속 지렁이 은신처에 빗물이 괸 모양이다. 물구덩이에서 살만한 곳을 찾아 지상으로 나오셨을 것이다. 블록 위에 물이 없으니 숨쉬기는 괜찮겠다. 그런데 여기는 처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산책로는 입주민들이 새벽부터 산책을 한다. 폭우가 내리고 하늘이 말끔하게 갠 날 아침에는 걷는 사람이 더 많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쓰레기 수거 차량의 바퀴는 지렁이 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다. 새벽 총알 배송을 생명으로 아는 택배 차량을 지렁이가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동화에 밟혀 으깨지고 자전거 바퀴에 치어 끊어지고 택배 차에 치어 으스러지고 무지막지한 바퀴에 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이 지렁이의 딱한 운명이다.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라. 제발 들어가세요. 염불 외듯 해도 지렁이 귀에 경 읽기라 제 가던 길만 간다. 더 안전한 곳은 어딜까 궁리하고 고심하며 죽을힘을 다해 기어간다. 내 말은 못 들은 척 그냥 간다. 얘야, 네게는 내가 신이니라. 이렇게 높은 곳에서 널 내려다보고 있지 않느냐. 나는 너의 미래도 보이느니라. 내 말을 들어라. 그래도 지렁이는 가던 길을 간다. 딱한 중생의 미래가 보인다.
깜짝 놀랐다. 더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진짜 신이 있지 않을까. 맞다. 바로 저만큼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가지 마라. 거길 가면 안 되느니라. 그리 가면 네가 으깨지고 끊어지고 으스러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의 운명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워하는 신이 저 위에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안절부절못한다.
어디를 밟을까. 어디로 발을 옮겨야 땅이 꺼지지 않을까. 어느 쪽에 시선을 두어야 눈부시지 않을까. 나는 우왕좌왕한다. 방부목 쉼터를 밟으면 ‘우지끈’ 무너질 것만 같다. 앞으로 나아가기 두렵다. 지렁이에게서 나의 운명을 돌아본다. 지렁이나 나나 우주의 눈으로 보면 미물이다. 사람도 지렁이도 우주 안에 하나다. 한 마리 지렁이가 우주의 섭리를 다 품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하나 가운데 모두가 있고 모두 가운데 하나가 있네. 하나가 곧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이네. 한낱 작은 티끌이 시방세계를 머금었고 일체의 티끌마다 시방 세계가 담겨 있네.’
딱한 중생에게 법성게의 한 말씀을 듣는다. 나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니 그대와 다를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