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노설(文奴說) / 신현식
글의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원로 수필가의 <주노설(酒奴說)>이란 작품에 눈길이 멎는다. 작품은 역시나 노련미가 넘실거린다. 유머와 위트가 낭자하여 감자탕처럼 구수한 맛의 그 글에 꼴깍 몰입된다.
우선 그분의 주력(酒歷)이 60년이나 된다는 것이 놀랍다. 문학을 하면서 술자리가 더 늘었는데 한번도 술을 끊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놀랍고, 그것들 모두가 나와 어찌나 닮았던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주력을 풀어나가는 그분의 능청스러운 너스레에 미소를 금할 수 없다. 그분은 문사(文士)가 되어 문(文)과 주(酒)에서 두루 대가들의 흉내를 내볼 요량이었다 한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문은 알아주지 않고 주석(酒席)에나 감초처럼 끼워주더라고 한다. 그나마 사양했다가는 간신히 걸어 놓은 이름마저 날아갈 것 같아 마시고 또 마신다고 한다. 그렇게 술에 대한 절개를 지키다가 그만 주노(酒奴)가 되었다는 글이다.
그분의 글을 읽으며 무릎을 친다. 주노(酒奴)가 아니라 문노(文奴)가 되어버린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분처럼 술을 좋아한다. 주석에 자리 잡고 앉으면 주구장창 자리를 지키는 편이다. 내가 일어서는 사람 소매를 잡는 것은 술 때문이 아니라 흥을 살려 너나 나나 한 줄 글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해서다.
나는 남들보다 뒤늦게 문학에 발을 디뎠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눈매 서늘한 여인마냥 문학이 좋았다. 내게 참새의 발톱만 한 감성이 남아 있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문우들과의 만남도 마냥 좋았다. 그런 만남을 잇기 위해 숱한 세월동안 동아리와 강좌에 앞장을 섰다.
그것만이던가. 강좌와 토론회를 쉬지 않고 열었다. 그것들이 어디 저절로 열리던가. 누군가가 자리를 마련하고 뒤처리도 해야 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앞장 선 내가 북도 치고 장구도 쳤다. 힘에 부쳤지만 그러지 않으면 문문(文門)에 들지 못할까 봐 아득바득 기를 썼다.
그렇게 끌어 온 십여 년 동안, 나는 단 한번도 행사에 빠지거나 늦어 본 적도 없다. 학창시절엔 1년 개근도 하지 못했었는데 10년 개근이라니.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산이 변한 그 세월 동안 왜 큰일이 없었고, 탈이 난 적이 없었겠는가. 딸 아이 혼례에 부모님 상례도 치렀다. 맏이여서 조상님 제사도 모셔야 했고, 고뿔도 숱하게 앓았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얼굴 비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행사나 모임이 없던 날은 어디 조용했던가. 천만에다. 매주 토론회를 진행해야 하기에 동료들의 글과 씨름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허구한 날 수필 속에 파묻혀 사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매일 수필 한 편을 인터넷에 소개한다. 책은 거들떠보지 않고 모바일만 끼고 사는 젊은이들을 위해서다. 마치 수필 전도사가 된 양 열심히 올린다. 바쁜 날에도, 과음한 다음날도 어김없이 올린다. 며칠씩 길 떠날 때엔 미리 예약을 해놓기도 한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무슨 극성이냐고 눈을 흘긴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내 글도 써야 한다. 내가 쓰지 않으면서 어찌 남에게 쓰라고 권하겠는가. 글이 어디 순식간에 써지는 것이던가. 재주 없는 사람이 글을 쓰려니 밤낮 고개만 주억거린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인들 제대로 되겠는가. 자연, 돌아오는 것은 아내의 잔소리와 친구들 원성뿐이다.
그런 가운데 어찌어찌하여 작품집 한 권은 냈다. 하지만 성에 차지는 않는다. 내세울 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울림이 있거나 가슴 짠하게 하는 그런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윽한 문향이 나는 작품도 없다. 바탕과 근본이 없으니 그럴 가망은 없는가 보다.
그러나 그런 명수필은 아니라도 그저 좋은 수필 한 편이라도 쓰고 싶다. 그래야 문(文)에 이름 석 자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주구장창 이렇게 글에 매달린다. 아내의 말마따나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옆집 처녀 짝사랑하는 총각처럼 이렇게 넋을 잃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 몸을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한다. 이렇게 나를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노예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문(文)의 노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구속당하여 고통스럽고 슬픈 존재가 될지언정 나는 기꺼이 문노(文奴)가 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