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를 놓다 / 김애자

 

 

지난여름, 제주도와 남녘을 거쳐 올라온 장마전선의 기압골은 산마을을 포진하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돌진하면서 비바람이 뒤엉키며 퍼붓는 물줄기에 골짜기 하나가 떨어지며 개울을 덮치자 성난 물살은 논과 밭을 휩쓸었다. 거대한 바윗돌이 서로 부딪치며 물살을 타고 굴러와 길가에 세워둔 승용차 세 대를 은박지처럼 구겨 놓은 다음 다리난간을 부서트렸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가 그 여세는 20년 간 키운 우리 집 주목울타리를 치고 들어와 순식간에 물바다를 이루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재난 앞에서 두려움에 떨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날이 밝자 눈앞에 전개된 실상은 기가 찼다. 119 구조대도 물이 빠진 뒤에나 들어왔다. 외지에서 들어와 전원주택을 짓고 행복하게 지내던 40대 젊은 친구는 실성하다시피 울부짖었으며, 아랫동네에선 집이 무너질 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늙은 아내가 압사 당하자 영감이 땅을 치며 호곡했다. 그럼에도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인간들이 지구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본때를 보여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시간 당 350미리를 퍼 부었다. 곳곳에서 산이 무너지고 개울이 범람하고, 농경지가 침수되었다.

 

우리내외는 눈만 뜨면 수해로 패어나간 마당과 집안 곳곳에 들어찬 토사를 퍼내는 일에 매달렸다. 정부지원이란 명분만 요란했을 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인근에 있는 공군부대에서 장병들을 지원군으로 보냈지만 삽자루 한 번 들어보지 않은 20대 앳된 청년들은 일머리를 몰라 시간만 때우다 돌아갔다. 충북수필문학과 충주문학 회원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장대비를 맞으며 도와주었지만 집이 제 꼴을 갖추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남편의 야윈 어깨가 날로 더 수척해졌고 나도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사람이 노동으로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나면 삶의 의미는 물론 존재감마저 상실하게 된다. 밤이면 지칠대로 지친 육신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듯 잠이 들곤 했다. 자고 일어나면 정신의 본성도 육체의 고통 앞에선 어쩔 수 없이 피폐해지는 사실에 나는 절망했다.

 

고심 끝에 집을 팔기로 했다. 20년 동안 자식처럼 애틋하게 돌보며 키웠던 정원의 나무와 조형물들은 우리들의 지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두고 떠난다는 건 대단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우리는 어려운 결단을 과감하게 내렸다. 5년 전 암수술로 점점 쇠약해지는 남편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의 미련을 두는 것은 부당한 집착이었다. 수해를 당했지만 정성을 다해 복구한 집은 드론을 띄워 사진을 올리자 울창한 대나무 숲과 연지에 가득 핀 연꽃과, 청동 아취를 감고 올라가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가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았다. 집은 쉽게 매매 되었고, 이로써 우린 20년 전에 떠났던 아파트 문화 속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도시로의 귀환은 나를 불면에 시달리게 했다. 수직으로 치솟은 15층 공간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숲에서 제멋대로 뛰어놀던 짐승이 우리에 갇힌 것 같처럼 답답했고, 뿌리가 뽑혀 나간 식물이 되어 시들어가는 현상이 이런 게 아닌가 싶도록 정서에 목이 말랐다. 참새들의 지저귐에 눈을 뜨던 아침이 그리웠고, 밤이면 지붕 위로 들꽃처럼 피어나던 별빛이 그리웠다. 어둠 속에서 우뚝 다가오던 검은 산의 능선도,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던 바람소리도 추녀 끝에서 울리던 풍경의 맑은 공명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창백한 기운이 전신으로 번지었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때때로 엄습했다. 그럴 적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귀에선 종일 이명이 그치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고서도 세 네 시간 정도밖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나던 어느 날 새벽에 나는 비로소 내 스스로 생의 뿌리를 뽑아 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내 자유를 우리에 가둔 것도 자신이란 점을 깨닫는 순간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이란 평범한 진리 앞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지금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자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수해를 본 지난 6월부터 나는 책 한 줄도 읽지 못했고 글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녹슨 감각과 감성을 되살리기 위해 처방전으로 뽑아든 것이 수 놓기였다. 용인에 사는 N선생님께서 수라도 놓으면 불면에 치료가 될지 모른다며 수놓을 원단을 보내온 게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랜 만에 색실과 수틀을 꺼내 놓고 앉으니 평온해졌다. 70년 중반이었다. 결혼 6년 만에 새 집을 장만하고 들어 앉아 수를 놓았을 때 나는 참으로 행복했었다. 27평 단독주택이 내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이었다. 창마다 보라색 커튼을 치고 그 안에서 동양자수를 놓았다. 가는 푼사실을 바늘에 꿰어 남색 공단에 매화꽃을 피우고 난을 피웠으며 모란도 피웠다.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건, 세상이 어찌 돌아가건 나와는 상관없이 누리던 충만함을 상기하는 순간, 삶이란 자신이 자신을 신뢰하면서 가꾸는 텃밭과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무명천에 수본을 그렸다. 손가락 마디도 굵어졌지만 시력이 노안이라 동양자수 대신 손쉬운 서양자수를 놓기로 하고 으름 꽃을 넝쿨과 함께 그렸다. 잎은 약간 추상적으로 처리했다. 다음으로 함지 가득히 피었던 연꽃 두 송이를 커다랗게 그려 수를 다 놓은 다음 커튼과 커튼 사이로 휑하게 드러난 창문에 가리개 삼아 걸어 놓고서야 혈흔처럼 남은 기억들을 지울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세월의 강을 타고 온 배에 더 이상 미련이나 애착을 두지 않을 것이다. 비워내는 일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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