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 김이랑

 

가끔 까만 추억을 찾아 길을 나선다. 풀잎 툭 건들면 초로처럼 맺힌 아리랑 가락이 와르르 쏟아지던 고갯길에는 별일 있었냐는 듯 들꽃이 해맑게 웃는다. 집들이 따개비처럼 붙어있던 자리에는 모텔과 전당포가 즐비하다. 지하로 들어가는 갱이 검은 입을 벌리던 산등성이에는 위락시설과 카지노가 들어섰다. 카지노는 도박으로 불야성을 이룬다.

 

또 해를 볼 수 있을까?

 

담배 연기 한 모금 머금고 입술을 오므리고는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동그란 연기로 자신을 마취시킨 사내들이 표어가 걸린 갱 입구를 바라본다. ‘아빠가 지킨 안전, 엄마 웃고 나도 웃고’, 가족 생각으로 마음을 다진 사내는 갱 안으로 철벅철벅 걸어 들어간다. 까마득한 고생대 지층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내들이 캐낸 검은 황금은 태백선 철도에 실려 전국으로 나갔다. 석탄으로 찍어낸 19공탄은 가난한 자의 아랫목을 따뜻하게 데웠다. 국가는 사내들에게 산업전사産業戰士라는 그럴듯한 칭호를 주었다. 사내들은 매일 지하에서 곡괭이를 들고 삶과 싸우는 전사였다. 보이지 않는 적의 습격으로 많은 사내가 전사戰死했다.

 

‘잘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우렁차던 어느 해 초겨울, 갱내 붕괴로 17명이나 막장에 갇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광업소는 물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모든 인력이 열흘이 넘도록 구조작업에 투입되었다.

 

갱내로 압축공기를 공급하는 파이프는 생명선이다. 갱도가 무너지면서 이 파이프까지 끊어지면 막장은 석탄층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 농도가 올라가 호흡이 곤란해진다. 전기와 통신까지 끊긴, 그야말로 칠흑 같은 막장에서 사내들은 느닷없이 뒷덜미를 덮친 죽음의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 의식까지 캄캄해졌다. 사고는 수습되었지만 살아서 해를 본 사내는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흉흉하고 음습한 바람이 불었다. 사내들이 출근하는 길을 어떤 아낙이 가로질러 부정이 탔다거나,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동료에게 이별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는 등, 무성한 이야기가 돌았다. 그러나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동네는 평온해졌다. 그것은 지나가는 바람이며 시와 때도 모르게 또 불어왔다.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어린 아들딸의 손을 잡고 떠났다. 남은 아낙들이 모여 그들을 전송했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누가 더 안타까운지 모를 이별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는 무사하니까 내 가족은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한 어린 목격자였다.

 

온통 탄가루를 뒤집어쓴 무채색 거리, 뒷골목 홍등은 유난히 선명했다. 밤이면 두려움을 잠시라도 잊으려 피난처를 찾는 사내들이 하나둘 숨어들었다. 그런 남편을 찾아 아낙들이 수건을 뒤집어쓰고 골목으로 찾아왔다. 고향 아줌마, 고향무정, 망향가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릴까. 아낙들은 문틈을 기웃거리거나 혀 꼬부라진 소리에 귀를 세웠다.

 

사고가 수습되어도 한동안 뒤숭숭했다. 막장까지 왔다는 자괴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더욱 증폭되었다. 사내들은 술과 유흥으로 자신을 마취시켰다. 니나노 니나노 늴리리야.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젓가락 장단에 휘청거릴수록 사내들의 인생 곡선에서 돈도 건강도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심부름 갔다가 ‘대포’ 한 잔 나누는 사내들의 대화를 들었다. 갱 밖으로 나와 들이켜는 담배 연기 한 모금이 제일 맛있고, 다음은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이며 다음은 집에 가서 품는 마누라라고 말했다. 아궁이처럼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갱과 일을 마친 사내들의 얼굴에 피는 하얀 웃음, 오감을 자극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사내들의 심리 곡선, 그 극과 극의 함수를 미적분微積分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갱도를 떠받치는 나무가 동바리이다. 사내들은 한 가정을 지탱하는 동바리였다. 다들 허리가 휘도록 일을 했지만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장사 밑천이라도 모아 떠나는 동바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느 동바리는 도박과 주색에 빠져 휘청거리다가 가정을 무너뜨렸다. 어느 동바리는 갱내에서 죽은 동료의 목소리가 들리고 가끔 환영도 보인다며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느 동바리는 하루라도 빨리 막장을 벗어나겠다며 숨 가쁘게 일하다가 오히려 가슴속에 진폐증이라는 탄광 한 구덩이 끌어안고 떠났다.

 

오늘은 대박을 터트릴 수 있을까?

 

해가 중천에 뜨면, 담배 연기 한 모금 빨아 입술을 오므려 볼을 톡톡, 동그란 연기로 자신을 마취시킨 사람들이 카지노 건물 속으로 들어간다. 저들은 샹들리에 조명 아래에서 밤이 새도록 욕망의 눈을 부라릴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면 단물 다 빠진 껌처럼 바깥으로 내뱉어질 것이다.

 

먹고살려면 이 길밖에 없다고, 땅속으로 길을 내던 그날의 개미들과, 하룻밤 천금을 노리고 불나방처럼 모여든 오늘의 베짱이들, 어느 쪽이 양지고 어느 쪽이 음지인지, 저긴 어디로 가는 길인지. 길을 찾아 걷다 보면, 땀과 눈물로 이룬 생의 보석까지 도박으로 탕진한 사람들이 시장 뒷골목에서 푸른 소주를 들이붓고 있다.

 

이 길 저 길에서 삶의 방정식을 풀어왔다. 그런데 저 앞에 서면 그만 생각이 막장에 닿는다. 저들이 보는 아침 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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