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 / 류창희
영부인들이 청와대 입성을 하면 식기 세트부터 바꾼다고 한다. 어느 분은 일본 도자기를 수입하고, 어느 분은 군대의 상징인 초록빛 무늬를 선호했으며, 당의를 입던 분은 본차이나의 화려함을 택했다. 단순하고 세련미가 있는 흰 그릇을 사용한 분도 있었으나, 대부분 봉황에 금장 두르는 것을 선호했다.
문양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지위를 훔치는 일이라고 했다. “장문중이 큰 거북을 두고, 기둥 끝에 산을 새기고, 대들보에는 수초 무늬를 그렸으니, 어찌 그를 지혜롭다 하겠는가?” 장문중이 채나라 특산물인 큰 거북을 집에 두었다. 원래는 천자만이 종묘에 두고 대사 때마다 길흉을 점치는 용도다. 대들보 상단에 산 모양을 조각하고, 동자기둥 하단에 수초 모양을 그리는 집의 내부 장식 문양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산과 수초 모양은 태묘나 종묘의 장식이기 때문이다. 왕의 상징이거나 신전이다.
공자께서 ‘인간의 도의를 힘쓰지 않고 귀신에게 아첨하고 친압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공자의 인물평은 예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장문중의 정치적 능력이나 공적을 무시하고 신분 이상의 짓을 가혹하게 비난했다. 우리도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할 때 단상에만 봉황새를 그렸었다.
서민들의 혼례문화도, 폐백실에서 신랑은 왕의 상징인 용문양을 가슴과 양어깨에 수놓은 곤룡포를 입고, 신부는 측천무후처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수놓은 활옷을 입는다. 가례복이라고는 하나 서민이 언제 한번 왕이나 왕비를 꿈꿀 수 있을까. 유럽 혹은 일본의 무사나 귀족들이 의복이나 마차에 가문의 상징인 사자나 독수리 도라지꽃 접시꽃 문양을 새겨 넣는 거와 같다.
오래전에 윤정희 백건우 부부가 흰 한복과 두루마기로 조촐한 결혼식이 화제였다. 그들은 굳이 귀족 흉내를 내지 않아도 이미 거장들이다. 그러나 서민은 무슨 문양으로 신분을 나타낼까. 백의민족답게 소복을 입고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 분꽃을 앞마당에 심었다. 꽃은 한철이다. 엄동설한 꽃이 필 리 없는 겨울에는 꽃을 그려 던지는 ‘화투’놀이를 했다. 꽃뿐인가. 사군자 십장생이 다 있다. 열두 달 그림 안에는 주문처럼 소망이 들어있다.
예전에는 대학생들이 배지 badge를 달고 다녔다. 봉황새 문양처럼 편 가르는 로고다. 배지가 없어졌다고 계급과 신분이 없어졌을까. 핸드백, 자동차, 아파트 등의 브랜드가 차별화한다. 내세울 가문이나 벼슬로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은 로고를 어디다 새길까. 몸뚱어리밖에 없다. 작게는 스스로 팔과 다리에 ‘♡, 忍耐, 차카개살자’ 크게는 등판에 용무늬를 새겨 가죽 곤룡포를 입는다. 문신文身이다.
신세대는 영어식 표현으로 ‘타투 Tattoo’라고 한다. 요즘은 타투가 또래집단 버킷리스트 중 여름 패션의 아이템이라고 한다. 문신의 어감은 형벌 같고, 타투는 개성을 표현하는 예술 같다. 취업과 미래가 불확실한 청춘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준다니 어쩌겠는가. 그들의 행위는 앤디 워홀을 뛰어넘는 “내가 곧 ‘대중’이다”고 표현하는 검은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의 외침이다. 인종차별 빈곤 같은 낙서 그래픽은 ‘요술 왕관’ 사인처럼 예술로 거리를 활보한다.
네팔 페와 호숫가 끝자락에 히피들이 많다. 그들의 머리 모양과 옷차림이 처음에는 낯설더니 볼수록 정이 간다. 어느 날 과다한 피어싱 piercing과 문신이 가득한 청년들 틈에 여자아이를 만났다. 팔과 손가락 하나하나 귀밑 목덜미까지 부챗살처럼 문신이 다채롭다. 다가가서 “예쁘다!”라고 하니, ‘웬 동양 꼰대 아줌마가?’ 하는 눈초리다. 놀림을 당했다고 여긴 모양이다.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니, 너희 나라 아이들도 문신을 하느냐고 묻는다. “당연!” 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더니 갖은 포즈를 취해준다.
그렇다. 나도 기지개 켜는 아이를 보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옆구리의 문양이 삐져나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남편에게 본 것에 대하여 이실직고했다. 당장 길길이 뛰면 내가 먼저 집을 뛰쳐나가려고 했다. “김중만, 윤도현, 이효리, 허지웅, 차두리는 되고…, 왜? 내 아들은 안 되느냐?” 아이 편을 든다. 진정, 문화 인류 학적 발언일까? 아니면 문신 앞에 겁먹은 아비의 굴복인가. “성인이고, 군 복무도 마쳤고…” 아들의 문제라며 타투 새김처럼 콕콕 찔러 말한다.
‘옥자’라는 영화에서 통역 역을 맡은 스티븐 연은 ‘통역은 신성하다’는 문신을 보여준다. 어떤 시선으로 문신을 보느냐가 문제다. 춘추전국시대처럼 ‘피세’의 방편인지, 젊음의 치기인지, 예술의 장르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레바논 내전을 그린 영화 ‘그을린 사랑’에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점 세 개 • • • 문신을 발뒤꿈치에 새겨 넣는다. 어미의 처절한 사랑과 아들의 만행에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보았다. 과연, 신이 존재할까. 내가 본 문신 중에 가장 아팠다. 영화 내용은 차마 글로 못 쓴다.
이제 타투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 엄마도 첩 떨어지라고 개명하여, 팥알만 한 새 이름을 팔에 새겼으나, 평생 효력이 없었다. 내 엄마뿐인가. 요즘은 전국의 어머니들이 전염병의 흔적처럼 눈썹 문신이 진하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 탑에 오르기 위해 줄 섰을 때, 히잡을 쓴 모슬렘 여성이 내 손톱을 보면서 “헤나 Henna?” 묻기에 “Yes!"라고 답했다. 그녀도 손등에 새겨진 낙원을 상징하는 꽃 모양의 헤나타투를 보여주며 환하게 웃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 이념 맹세 염원이 담긴 문양과 빛깔들, 이제 나는 손톱의 붉은 봉숭아 꽃물도 그만둘 때가 되었다. 외모도 마음도 그냥 그대로 무문無紋이고 싶다. 나에게 무문은 세월에 대한 순응이다.
글에도 문채文彩가 있다. 문리文理가 터져야 한다. 아들도 나도 글을 쓴다. 우리 모자에게 글이 무슨 커다란 부와 명예의 상징적인 문양을 선사할까. 그냥 쓰고 싶어 쓸 뿐. 편안한 마음으로 이랑과 고랑 사이의 돌멩이를 골라내고, 쉼표와 마침표를 적절하게 찍을 수 있는 문 文의 이치나 터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