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돌 / 이승숙
작은아이의 방문이 빼꼼히 열려 있다. 투명 인간처럼 지낸 게 달포가 다 됐지 싶다. 문을 열었다는 건 마음을 풀고 싶다는 신호다. 묵언으로 시위하는 아이나 엄마인 나도 힘든 시간이다. 시시때때로 버럭 대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적이 당황스럽다. 그럴 땐 ‘엄마’라는 자리를 던져버리고 싶다. 휘날리는 봄꽃처럼 내 마음이 난무한다.
화로의 불이 쉽게 사위지 않도록 눌러 놓는 돌이나 기왓장 조각을 불돌이라 한다. 평소 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차깔한 마음을 풀지 못하는 제 속은 오죽할까 싶다가도 마들가리 같은 삶에 나도 지친다.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것과 알량한 자존감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나도 아이의 마음을 풀려고 애달파하지 않는다. 노년의 나이에 그럴 기력도 없거니와 나 또한 냉전으로 응수한다. 제풀에 지친 아이는 슬금슬금 나의 눈치를 보며 화해의 시간을 잰다. 그러면서도 먼저 다가오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뿐이다.
하늘하늘한 봄바람이 꽃구경하기 좋은 날이다. 곧장 통도사로 차를 몰았다. 일주문 옆 수양매화가 다소곳이 꽃잎을 연다. 꽃이 피고 질 때까지 겸손을 잃지 않고 땅을 하늘 삼아 피는 매화다. 일주문에 들어서니 만첩홍매화와 분홍매화가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매화 꽃잎은 보통 다섯 장이 기본인데 다섯 장 이상인 것을 만첩 매화라고 한다.
영각 앞 자장 매화가 흐드러지다 못해 붉은 불을 뿜는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화려함의 극치다. 바람 따라 코끝을 스치는 매향에 정신이 아슴아슴해진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진사 틈에서 나도 몇 컷을 눌러 본다. 이런 모습이 일상인지 지나는 스님은 무정한 눈빛 한번 줄 뿐이다. 매화는 수백 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꽃으로 젊음을 과시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까마득한 날이다.
달 밝은 밤, 그 누군가는 이곳에서 흐느끼며 울지 모른다. 왠지 외롭고 고독한 자들의 마음을 곱게 안아줄 것 같다. 그 어떤 절대적인 신보다도 자연이 더 성스러울 때가 있다. 꽃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 꽃처럼 화사하다. 행복을 주는 자장매화가 부처고 보살이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꽃잎도 공중 부양을 한다. 꽃 지기 전에 어서 벗들을 초대해야겠다.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어도 좋고, 안개비나 작달비가 내리는 날은 더 운치가 있을 테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한다. 자장매화의 특성이 수행자의 구도행과 닮았고 자장율사의 지계(持戒) 정신을 표현한다고 해서 자장 매화라 한다. 매화에 취한 사이 벌써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다. 상춘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도 곧장 집으로 향한다. 밀려드는 자동차의 붉은빛이 만개한 홍매를 뿌린 듯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어곡 교차로에서 ‘퍽’ 하는 순간 홍매의 환영에서 깨어났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고가 난 것이다. 평소에 눈 감고 다녀도 훤한 길이다. 그것도 좌회전 1차선에서 직진하다니.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다. 복잡한 퇴근시간에 협소한 공단길로 왜 접어들었을까. 아직도 그게 의문이다. 분명 넓은 국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엊저녁 꿈자리가 사납더니 꿈땜을 톡톡히 한 셈이다. 나의 안 좋은 꿈은 예전에도 신통하게 맞아떨어졌었다. 몸 안 다친 게 어디냐며 지인들 모두 이구동성이다. 내 생애 제일 비싼 매화도 봤겠다, 올해는 꽃길만 펼쳐지리라 믿으며 혼자서 위안 중이다.
작은아이의 방문을 열다가 화들짝 놀랐다. 책상 위 선물 보자기의 매듭이 가위로 싹둑 잘려져 나갔다. 끈을 자르는 건 이해를 하지만 보자기를 그것도 새 보자기를 자르다니. 화가 나기는커녕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매듭을 풀기보다는 가위를 먼저 들이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오해를 풀기보다는 그냥 자르는 편이다.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냥 덮어 버린다. 정면 돌파보다 혼자서 더운 가슴을 식히다가 끝내는 내 마음을 닫아버린다. 어쩌면 마음 다치는 게 두려워서 미리 울타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모든 게 내 탓이지 싶다가도 결국은 깊은 가시가 된다.
찬바람에도 꽃이 피는 강한 기질의 매화처럼 아이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아이의 방문과 창문을 열어젖히고 갇혀 있던 불시울들을 끄집어낸다. 오래도록 감추었던 가슴 안의 불돌도 모두 빼어 날린다. 삼월의 햇살이 갈지자로 들어와 앉는 봄, 봄이 또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윽한 매향이 휘도는 봄의 만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