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음의 쓸모 / 이규석

 

 

잡초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나는 주말마다 고향으로 달려간다.

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잡초의 계절인가, 이를 증명하려는 듯 대문을 열자마자 기세등등한 잡초들이 안기듯 달려든다. 하지만 텃밭 채소들을 비실거리게 만든 잡초가 여간 밉살스러운 게 아니다.

장맛비 잠시 그친 사이 겉 자란 풀밭으로 뛰쳐나가 선무당 칼춤 추듯 낫을 휘두르자 목이 날아가고 허리가 잘린 잡초들이 초록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개선장군처럼 돌아서지만, 잡초들은 금세 되살아난다. 이긴 것이 아니었다. 끝난 것도 아니었다. 뽑고 또 뽑고, 자르고 또 잘라도 끝없이 살아나는 잡초는 기어이 내 마음조차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망초, 명아주, 엉겅퀴, 쑥부쟁이, 냉이, 억새, 강아지풀, 며느리밑씻개 등 우리의 산과 들, 논밭에는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 칠백 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도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었다. 사전을 뒤졌더니, 대수롭지 않은 풀이라서 잡초라 부른다고 했다. 감자밭에 난 상추도 잡초라고 괄시당하는 판에 어찌 제 이름이 호명되기를 바라랴.

잡초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역적 귀양 보내지듯 텃밭에서 멀리 내쫓기고 만다. 넝쿨로 뻗어가면서 나무의 숨통을 조이는 고약한 환선덩굴이야 미움을 받아도 싸지만, 일찍 봄을 알려주기 위해 맨몸으로 겨울을 견뎌낸 냉이는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꽃보다 더 상큼한 표정으로 벌 나비를 부르는 개망초나 귀엽고 깜찍한 애기똥풀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비록 하찮은 풀이라도 나름대로 사명이 있고 저마다 개성 넘치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무심한 사람들은 그냥 잡초라고 불러 재낀다. 어느 시인은 '내 이름 모른다고/ 잡초, 잡초라고 하지 마라// 내가 당신 이름 모른다고/ 잡것이라 하더냐'(정진용 〈풀〉)고 절규했다.

그리 무시당하고 홀대받으면서도 잡초들은 마른 땅 젖은 땅 가리지 않고 잘도 자란다. 도대체 누가 잡초의 씨앗을 이리도 야무지게 뿌려대며 어떻게 돌보았기에 저리도 씩씩하게 자랄까. 질기지 않으면 잡초가 될 수 없었던지, 바랭이는 오체투지 하듯 전진하면서 마디마다 사방으로 뿌리를 내린다. 잠시 한눈을 팔면 뜨거운 너럭바위도 타고 오른다.

뭍사람들의 발걸음에 밟히고 수레바퀴에 깔려 시퍼렇게 멍이 든 질경이는 다른 풀들과의 다툼이 싫어서 아예 길바닥에 나와 산다고 했다. 배고픈 시절에 구황식품 노릇을 톡톡히 해왔던 쇠비름은 뿌리째 뽑혀 열흘을 뙤약볕 아래 내던져졌다가도 소낙비 한줄기에 되살아날 만큼 끈질기다. 내가 그들 근성의 반의반만이라도 지녔더라면 우리 집 텃밭은 이미 낙원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채소에 물을 주고 있는 농부에게 "왜 채소는 정성껏 보살피는데도 시들하고 잡초는 돌보지 않아도 왕성하게 잘 자라는가?"고 물었더니, "잡초는 대지의 여신에게 친자식이고, 사람이 심은 채소는 의붓자식이기 때문이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이솝우화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래서 부모 잘 만난 잡초는 떵떵거리며 살아가는가. 하지만 햇볕과 물, 바람이 어찌 그들에게만 부모 노릇을 하였을까 싶다.

나만 잘 났다고 거들먹거릴 일이 못 된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제 혼자의 힘으로는 쌀 한 톨 만들 수 없고, 대추 한 알도 붉게 익힐 수가 없다. 그런데도 햇볕은 잘난 사람에게도 못난 사람에게도 축복처럼 쏟아지고, 비는 선한 사람의 논에도 악한 사람의 논에도 똑같이 단비로 내린다.

모든 생명체가 싱싱하게 살아가라고 때맞춰 바람까지 설렁설렁 불어댄다. 얼마나 너그러운 하늘인가. 그런데 나는 내 안의 자그마한 악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잡초를 뿌리 뽑지 못해 안달이다. 어쩌면 초지일관 제 뜻대로 살아가는 잡초가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산불이 난 산은 언제까지나 민둥산이 아니었다. 불난 자리에는 항상 잡초들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이어서 관목, 교목의 순으로 나무들이 들어서고 해를 거듭하며 산은 다시 숲을 이룬다. 실처럼 가는 뿌리로 지구를 움켜쥔 잡초들이 토양의 유실을 막아가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유용하고 무엇이 무용한 것인가? 민들레는 꽃만 고와서 살아남은 것은 아닐 것이다. 가시투성이인 엉겅퀴는 여린 순을 나물로 내주고 뿌리는 한약재로 귀히 쓰인다. 청려장이라는 명품 지팡이는 흔해 빠진 잡초, 명아주로 만들어진단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유익하지 않은 잡초가 없다.

정신없이 풀을 뽑다가 얄궂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누군가가 세상의 풀을 모조리 뽑아버린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땅덩어리는 양철지붕처럼 뜨거워질 테고, 수온이 높아진 바다는 허구한 날 크고 작은 태풍을 몰고 다닐 것이다. 이상고온으로 이미 지구 한쪽에선 대형 산불이 이어지고, 반대쪽에선 폭우가 그치지를 않아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바이러스의 창궐로 코로나 같은 괴질이 또 나타날까 두렵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벌이 사라지면 과일도 함께 사라질 텐데 그러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나. 간 큰 가해자였다가 어느새 대책 없는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인간의 탐욕과 오만은 어디까지일까, TV에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도 이젠 풀과 그만 다투고 더불어 살기로 했다. 텃밭에는 자갈밭에서도 잘 산다는 메밀 씨앗을 뿌렸다. 연둣빛 여린 싹들은 힘겹게 고개를 내밀었지만 포기마다 핀 꽃들이 봉평의 메밀밭처럼 울안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담장 아래는 잡초만큼 번식력이 강하다는 맥문동을 구해다 심었다.

아름드리 왕버들 아래 보랏빛 꽃바다를 이룬 성주의〈성 밖 숲〉처럼, 우리 집에도 담장 따라 꽃물결이 일렁이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호미질 했다. 봄 향기 으뜸인 취나물도 꾹꾹 눌러 심었다. 한 해만 지나도 배 이상 번진다는데 어떻게 제초제를 뿌려댈 것인가, 어림없는 일, 더 굳세게 자라라고 퇴비를 듬뿍 뿌려주었다.

멀리서 바라본 초록은 평화였으나 가까이 다가가서 본 수풀은 전쟁이었다. 잡초는 비록 거칠게 살지만, 짐승들에게는 먹이가 되고 벌레들에게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유익하였던가? 이제부터라도 지구를 꽉 잡고 있는 잡초에게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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