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풍경 / 허정진
깊은 산속 농막에서 몇 년간 지내본 적 있었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여 전망은 그지없이 좋았지만 이웃도, TV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사계절 내내 오직 자연의 소리밖에 없었다. 숲속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이 여울져 휘감는 소리, 겨울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소리, 지둥 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산장 주위를 배회하는 산짐승 소리, 멀리서 풀국새 울고 장꿩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까지 들렸다. 더 마음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그들만의 낮은 주파수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꽃이 피고 지는 소리, 해토머리 나무줄기에 물오르는 소리, 겨울밤 함박눈 내리는 소리 같은 것들. 그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고요와 여유 덕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시 소리가 그립고 궁금하기도 했다. 혼잡한 도심이 뱉어내는 차량 소음과 왁자지껄한 군중들 외침, 그 흔한 배달 오토바이 굉음이라도 떠올리면 내가 살던 동네 길목과 도심의 즐빗이 늘어선 빌딩들이 생각났다. 도시든 시골이든, 너든 나든 소리는 저마다의 풍경을 각자의 가슴 속에 끌어안고 산다. 지금도 예전 산장 생활을 되돌아보면 산과 바람과 소낙비와 풀벌레가 만들어 준 소리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사람들은 착하고 따뜻한 소리를 좋아한다. 자극적이지 않고 마음을 편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소리다. 자연이 주는 소리가 그렇고, 첼로나 팬플루트 같은 영혼을 담은 악기 소리가 그렇다. 아이 울음소리, 글 읽는 소리, 다듬이 소리의 삼희성(三喜聲)도 그렇고, 어린 강아지들이 어울려 마당에서 신나게 가댁질하며 뛰어노는 소리도 사랑스럽고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소리는 소리로서 끝나지 않는다. 소리를 듣고 풍경이 그려지는, 물 흐르는 소리가 단순한 ‘물소리’가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청량감이 느껴지는 가치 현상이 일어난다. 자연이나 일상의 소리 환경을 조경학에서는 음향 경관 또는 소리풍경이라고 한다. 소리풍경은 실제로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뿐만 아니라 주관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심상, 기억 속 소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소리가 시공간을 넘나들어 과거의 경험, 배경, 사연, 인연, 흔적들을 소환하고 추억을 채굴한다.
옛사람들이 집에서 명승고적의 그림을 보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와유(臥遊)가 가능한 것도 그 이유다. 누군가 감옥에서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 듣고도 계절이 오가는 것을 알았다는 것도, 오랜만에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도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이 먼저 와닿는 것도 기억 속에 풍경의 틀을 촘촘히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악보의 소리풍경이 있어 상상력만으로 그 유명한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소리에 예민한 날도 있다. 마음이 허할 때나 외로움의 그림자가 스며있을 때는 사물들의 곡성마저 들려온다. 형광등으로 전류가 물 흐르듯 빨려 들어가고, 화장실 샤워기에서 수돗물이 뚝뚝 떨어지고, 방문 틈새에서는 밤새 삐거덕거리는 기척이 들려오며 불안과 초조를 한껏 부채질한다. 카메라 줌인하듯 소리에도 원근법이 있는지 신경을 집중할수록 상상으로 만든 풍경은 자꾸 부풀려지곤 한다.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태초에 세상의 모든 생명과 물상은 고유의 소리를 갖고 태어난다. 소리가 곧 존재의 증명이고, 그것이 이미지화되어 서로 간에 인지와 판단의 기능을 한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무성영화처럼, 음향도 없는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무의미한 일이다. TV보다 라디오나 음악처럼 소리로만 만들어 내는 정경이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천둥과 바람도 형상은 없지만 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귀가 나빠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일찌감치 난청 증세가 있어 남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애면글면 귀청에 매달린다. 낮거나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 질감 나쁜 마이크 소리는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한다. 방법은 없다. 절반은 소리로, 절반은 풍경으로 전체 내용을 직감하고 판단한다. 이러다 언젠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면 그나마 풍경마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쉬운 마음이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난청이나 소음 탓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칭찬하는 소리만큼 듣기 좋은 소리도 없다는 말도 있다. 믿고 싶은 말만 믿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확정 편향이거나, 편하고 손해 보지 않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남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떠드느라 주위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마음으로 듣는 소리에 풍경도 따라온다. 초저녁잠에 빠진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한낮 땀 흘리며 일했던 노동 현장이 떠오르고, 아내의 가만한 한숨 소리를 듣고 친구 앞에서 가난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쓸쓸한 발걸음이 그려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 하더라도 듣는 이의 여유나 감성, 공감대가 없을 때는 풍경이 따라오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포용하는 배려심과 겸손함이 부족해 추억 속에 좋은 풍경을 많이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시인은 나이가 들고서야, 힘이 빠지고서야, 이별을 경험하고서야 겸손한 귀를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귀뚜라미 소리가 선명해지고, 달이 뜬 것처럼 소리의 모양이 둥글어지고, 창밖 풍경을 듣는 귀의 자세가 순해졌다고 한다. 내 말을 덜어내고, 내 목소리를 낮추는 마음이 있어야겠다. 앞서려고만 말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비록 귀로 듣는 소리는 자꾸 닫혀 가지만 대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 목소리만 들어도 평화로운 초록 들판의 풍경이 떠오르는, 누구에겐가 반갑고 보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듣는 소리가 좋으면, 듣는 마음이 겸허해지면 나의 소리풍경도 더 여낙낙하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