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있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기상천외한 그의 독창성 때문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전시장은 '꿈의 환상' '관능성과 여성성' '종교와 신화' 세 가지 주제로 꾸며져 있었다. 그가 초현실주의를 채택하게 된 것도 다름 아닌 꿈과 현실 사이의 대조이거나 혹은 상충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자신의 야생적 이미지를 꿈을 통해 표출해 내고 있었다. <서랍이 달린 미로의 비너스>도 새로웠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흡사 사슴뿔처럼 생긴 두 개의 나뭇가지에 걸쳐져 녹아내리고 있는 시계였다.
<시간의 단면>이라는 제목의 청동 조각품이다. 갈색 시계 판에서 뚝 뚝 아래로 녹아내리는 쇳물은 마치 시계가 흘리는 눈물 같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계….' 그 앞에 섰더니, 아득한 기억의 창고에서 크로버 시계 하나가 눈앞에 떠올라 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원형 판에 갈색 줄이 달린 시계였다. 남녀 공용인 그 시계를 놓고 나는 동생과 얼마나 다퉜던가. 중학교에 갓 들어간 남동생은 시계가 차고 싶었고 고등학생이 된 나는 실제로 시계가 필요했었다. 시계가 귀하던 때(1957년)였다. 우리 남매는 그 시계를 번갈아 차고 다녔다. 세 살 터울이던 동생과 다툰 것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 장기도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 애한테서 배웠고, 소낙비로 동굴에 갇힌 소년들처럼 우리는 마루 밑이거나 광에서 낄낄거리며 공상적인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었다. 어린 그 아이의 말이 지금도 나의 어떤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니.
"누나, 나는 9자가 참 좋아, 9자는 행운의 숫자야,"
무슨 근거에서였는지 저승에서라도 그 애를 만나면 꼭 한번 물어 보고 싶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내가 아직까지 그 9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학기 말 고사를 치르고 나서 동생의 몸은 갑자기 고열로 펄펄 끓었다. 친구 집에서 시험 기간을 보내고 돌아온 뒤였다. 병명은 뇌염, 동네 병원에서 서울대학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졌다. 옮겨지기 전날 밤 문병을 갔을 때 히죽이 웃어 보이던 얼굴이 다였다. 그 무렵 나는 어느 문학 콩쿠르에 참가할 작품을 쓰고 있을 때였다. 들창의 어둠이 걷히고 부음을 알리는 전갈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영안실 앞에 멍하니 쭈그리고 앉아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일찍 퇴직한 그분에게 장남은 희망이었는데.
우리는 동생을 데리고 미아리 공동묘지로 들어섰다. 관이 들어갈 만큼 땅이 파이고 동생을 묻으려는 순간, 나는 내 팔뚝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속으로 그 시계를 몇 번이나 풀어 그 안에 넣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흙이 관 위로 쏟아 부어졌고 시계를 독차지한 마음은 여전히 편치 못했다. 하루걸러 그 애의 몫인 것 같은 나날을 속으로 짚어 가며 지냈다. 기이한 동거인 셈이었다.
비탄에 빠져 아버지가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양복 주머니에 면도날이 있을까 봐 밤마다 몰래 뒤져야 했고, 어머니는 부득이 절간으로 요양을 떠나셨다. 동생의 학교에 찾아가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담임선생에게 어떻게 말하고 돌아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식구들 모르게 이따금씩 미라이 공동묘지를 찾아가 한나절씩 무덤에 기대어 책을 읽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 애를 외롭지 않게 하려고 내가 죽음 쪽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 그때의 생각이었고, 이상하게도 그곳에 가면 집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식구들과 마주치는 일을 피하려고도 원고 쓰기에 매달렸었다. 그 덕으로 박수를 받긴 했지만 미 8군에서 주는 파스와 나이드라지드를 매일 한 주먹씩 먹어야 했다.
수업 시간에도 부로바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동생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제법 세월이 지나 식구들은 평정을 찾은 듯했지만 아버지는 약주만 드시면 '한 많은 미아리 고개'를 외치셨고 어머니는 그 후 7년밖에 더 살지 못하셨다. 몇 년 뒤, 이장 공고를 통보받았으나 나 혼자 처리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승가사에서 제야를 보내고 아침 일찍 그곳으로 직행했을 때 휑하게 펼쳐진 들판,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택지 개발로 이미 쓸려나간 동생의 무덤, 그 잘못을 어디에다 빌랴.
지금도 나는 보호자 없이 처리된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무연고자의 화장 처리를 떠올리며 추운 겨운 녘, 홍제동 뒷산에 올라 화장터에서 피어나는 누런 연기를 보며 황망히 서 있기도 했다. 바람결에 와닿는 누린내 속에서 동생의 실체를 느껴 보려고 애썼다. 우리는 생사를 곧잘 구름에 비유한다. 그리고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그것마저 놓아야 한다지만 말처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도 묘지 찾아다니는 버릇은 그때 잃어버린 무덤에 대한 어떤 특별한 보상 심리가 뒤따른 것일지도 알 수 없다.
"죽음이란 원래 없는 것이요,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한다면 부스럼 태지와도 같은 시신은 아무렇게나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이런 선사의 말씀으로 한 가닥 위안을 삼기도 하고 "흙으로 돌아간 나는 결국은 흙이 되어 없어져 아무것도 없는 공으로 화하고…." 도연명의 자제문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한때 실험극장 동인들과 함께한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학교가 파하면 보신각 옆에 있는 아세아 빵집에 모였다. 어쩌다 막걸릿집에라도 가는 날이면 나는 가끔씩 이 시계를 끌러야 했다. 대개 김성옥 씨가 계산을 했는데, 그때마다 돈이 모자라면 내게 시계를 풀라고 했다. 다음날 아세아빵집에 들르면 시계는 늘 그곳에 맡겨져 있었다. 동생도 이런 일이라면 기꺼이 동의해 주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꿈과 환상'은 동의어이기만 한 것인가. 연극에 대한 꿈은 짧은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얼마 뒤 어머니가 빈 집에서 혼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칸나가 핏빛 목울대를 뽑고 있는 여름 한낮,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과 헤어질 때 '혹 이것이 마지막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으로 턱없이 가슴이 뛰어올 때면 마음속으로 고별사를 써 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창졸간에 덮쳐 온 파도 때문일까. 점차 저항 없는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학교가 아닌 사무실로 출근을 하게 되면서 장남이던 그 애가 문득 그리워지곤 했다. 둘이 차던 시계의 운명처럼 그 애 몫을 대신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그 애와 함께였는데 누구의 뜻이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멈추어 버린 시계, 부로바의 수명은 1965년 여름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끝나 버린 것은 시계만이 아니었다. 열정으로 들끓던 내 인생의 여름날도 그렇게 그 애도 내게서 차츰 멀어져 갔다.
이성의 통제 없이 상상력이나 환각력에 의하여 무의식 속에서 표출하려고 했다는 저 달리의 시계처럼 늑골이 부러지듯 숫자판이 휘어져 줄줄 녹아내리고 있었던 나의 시계, 그것들은 실체로서 영구할 수는 없지만 다리의 작품 <기억의 영속>으로 되살아나 지금 내 가슴에 더운 불을 지피고 있지 아니한가.
눈을 감고 기억의 통로를 따라 근 반세기 전으로 돌아가 본다. 견디기 힘든 지각의 균열로 뻐개진 가슴, 어머니는 그때 정신을 잠깐 놓으셨고. 호각처럼 나는 오후의 미열에 들떠 있었다. 세상이 텅 비어버린 듯한 한낮의 공포, 석류의 피멍울 같던 아른아른한 상흔들이 투명하게 떠오른다. 3년의 세월이 지나서 아버지는 당신이 바라시던 대로 동생이 죽은 달 그 애 곁으로 떠나셨다. 살갗에 와닿는 소슬한 바람마저 서먹하게 느껴지던 그런 초가을 무렵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늘 이맘때쯤이면 비감해 하셨던 게 생각난다. 그분의 가슴속을 헤쳐 보면 휘어져 녹아내린 시곗바늘은 아마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멎어 있을 듯하다. 내게도 그 시간들이 공동의 얼룩진 폐허의 어느 한 단면처럼 암각화 한 장으로 남아 있다. 나비가 누에고치에서 빠져나오듯 어두컴컴한 그 전시장 입구를 빠져나왔다. 긴 터널을 지나온 것만 같다. 목을 축이려고 잠시 노천카페로 가서 앉았다. 날은 어두컴컴해지고 엷은 어둠은 위로하듯 나를 감싼다.
그때였다. 푸드득 눈앞을 스치는 검은 그림자, 별안간 풍장이란 낱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모두 바람이 거두어 간 생명들이었다. 바람이 데려간 목숨들.
하긴 저 이집트 파라오들의 거대한 무덤들초차 종내에는 세월의 바람 앞에서 풍사로 흩어지지 않았는가.
비로소 나는 관 하나를 마음속에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싱그러운 6월의 나무 냄새가 폐부에 깊숙이 앉는다. 이제야말로 '시간의 단면' 속에 나 그대로 풍화되어도 좋으련만
가벼이 볼에 스치는 바람을 나는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