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치는 죄가 없다 / 홍정현
이 나이에 반성이라니 서글프다. 부끄럽다.
갈치에 관한 이야기다. 본질적으로는 그러하다. 주인공인 갈치는 지금 우리 집 김치냉장고 안에 조용히 누워있다. 그리고 잠시 후 버려질 것이다. 아파트 주차장 구석 음식물 수거함. 나는 그것의 덮개를 열고, 죄책감에 움찔거리는 마음의 미동을 애써 무시한 채, 개미와 초파리가 우글거리는 그곳으로, 어떤 요리로도 변신하지 못한 갈치 한 마리를 투하할 것이다. 갈치가 아니라 고등어였다면 덜 힘들었을까? 아니,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고등어였어도 나는 양심의 힐책 속에서 괴로워했을 거다.
기억력을 ‘풀가동’해 본다. 저 갈치의 근원에 대해. 머릿속 필름을 되돌리고 되돌려 나온 글자는 ‘일본’이다. 얼마 전,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정현아, 일본 방사능 오염수 방류 어쩌냐.”
다짜고짜 친구가 물었다. 고등학교 친구라 예의상 하는 인사나 안부는 원래 생략하는 사이. 다짜고짜 받은 질문에 나 역시 다짜고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지혜로운 중년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 허세가 점점 늘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수준의 과학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대답했다.
“편서풍 때문에 해류가 시계방향으로 올라가니 사실 하와이나 캐나다, 미국 서부가 우리나라보다 더 빨리 위험한 거 아닌가?”
“그래? 지금은 해산물 먹어도 될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방사능 오염수에 관한 이야기만 후딱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셀로판지처럼 얇은 나의 팔랑 귀는 친구에게서 흘러나온 불안을 그대로 흡수했고, 불안으로 잠식된 나의 심장은 이성적 판단을 사뿐히 즈려밟고 부화뇌동을 실행하는 버튼을 눌렀다. 나는 냉동 생선을 사서 냉장고에 가득 쟁여놓고 싶어졌다. 그 욕구는 몹시도 강하게 나를 점령했고 손가락은 거기에 순응해 바로 휴대전화 쇼핑 앱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의 특대 제주 냉동 갈치는 일본 때문에 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찌 보면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여 다소 즉흥적이나 좋게 보자면 국제 정세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한 현명한 ‘K-주부’의 모습이라 볼 수 있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시간이 흘러 추석이 되었다. 연휴의 마지막 날인가. 나는 오늘 또 무엇을 해먹을까 고민하다 냉동실 갈치를 떠올렸고, 마침 시판되는 갈치조림 양념장도 있고 해서 언 갈치를 해동하기 위해 싱크대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소파로 가서 누웠다. 추석 때 시댁에서 한 일은 간단한 설거지뿐인데, 왜 이리도 몸은 무거운 건가. 피로 회복을 위해 비타민과 유산균을 삼켰으나 타고난 게으름 때문인지, 갱년기 때문인지 미열이 느껴지면서 몸이 점점 무기력해졌다.
갈치를 손질해야 했다. 이미 적당히 다듬어 나온 갈치였지만, 어려서부터 비늘을 깨끗하게 벗겨낸 ‘뽀샤시’한 갈치만 먹어왔기에 갈치의 은빛 비늘을 반드시 벗겨야만 했다. 친정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신다. 최상의 청결함을 추구해 재료를 손질하시고, 어머니 고향인 서울 특유의 담백하면서 ‘달달’한 음식을 만드신다. 딸의 요리 실력은 어머니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예외는 있는 법. 불행하게도 내가 바로 ‘요리 실력의 모전여전 설’의 예외이다. 눈과 입은 어머니 덕분에 단정하고 깨끗하면서 맛있는 음식에 길들어졌는데, 스스로는 그것을 만들 수 없다는 괴리감에 나는 힘들었다. ‘계량치’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사실 내가 만든 단어다. ‘몸치’, ‘길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계량치’. 정확한 계량을 못 하는 사람. 바로 나다.
과학교사였던 내게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과학교사가 계량에 약하면 여러 흉한 장면이 도출된다. 가령 학생들 앞에서 시범 실험을 하는데, ‘짜잔’ 하고 시각적인 화학변화가 나타날 순간에, 측정에 오류가 있어 시험관에 아무 변화가 없다면? 바로 학생들의 야유와 놀림을 듣게 되고 교사로서 신뢰가 조금 떨어질 수 있다. 내 경험 이야기다. 요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레시피를 충실히 따라 해도, 내 음식은 어딘가 싱겁거나 짰다. 국인지 찌개인지 정체성이 모호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나. 아, 갈치 손질. 어머니 덕분에 비늘이 없는 깔끔한 누드 갈치만 보고 자라서 당연히 비늘을 벗겨야만 했지만,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구부리기 힘든 손가락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 게 싫어 계속 미루었다. 유명 정신과의사가 말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완벽하게 못 할 거 같아서 일을 미루며 하지 않는 사람. 혹시 나도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아닐까. 갈치는 반드시 비늘이 없는 채로 양념장에 조려져야 진짜 갈치조림이라는 나의 완벽한 기준. 그냥 비늘을 포기하고 조림을 해도 되는데도, 그걸 용납할 수 없어 한없이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더는 지연할 수 없는 시간이 왔고, 나에게만 중력이 몇 배로 작용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저녁은 간단히 먹자. 아직도 배가 부르네.”
남편이 말했다. 간단히 먹자, 이것은 무언가를 새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평소 남편은 간단한 상차림을 좋아했다. 밥, 국, 김치, 김.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가끔은, 온갖 생색을 내며 남들보다 오래 걸려 만든 내 음식이 ‘생색-걸린’ 시간에 반비례하는 맛이라 그런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뜻을 수용해 그냥 냉장고에 있는 반찬으로 조촐하게 저녁을 먹었다. 녹은 갈치는 김치냉장고로 들어갔다. ‘갈치조림은 내일 하기로.’
연휴가 끝나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평일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나 하나. 아들은 태평양 건너 대학에 있고, 남편은 직장에서 저녁을 먹고 온다. 그러니 나의 끼니는 대충 차려진다. 혼자 외식도 하고, 라면도 먹고, 밥과 밑반찬, 남은 반찬으로 때운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나는 뭔가 어렴풋이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그게 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고, 저녁에 갑자기 해동된 갈치가 떠올랐다. 벌떡 일어났다. 조림을 해야 했다. 냉장고를 뒤적였다. ‘아, 이런. 무가 없다.’ 조림의 핵심재료가 없었다. 무 하나 때문에 장을 봐야 하나.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고 비가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다음날 낮에 마트에 가기로 하고 다시 미뤘다.
그리고 시간은 또 흘렀다. 잊어버렸다. 잊어버린 건지, 잊은 척한 건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오늘에서야 나는, 갈치의 존재를 깨달았다. 무의식 어두운 밀실 속 갈치가 내 의식의 수면 위로 흐물거리며 떠올랐다. 갈치는 이미 모든 가능성을 상실하고 죄책감의 형상화로 마지막 자신의 실존을 구현하고 있었다. 김치를 꺼내기 위해 김치냉장고를 열다가 축 처진 채 누워있는 갈치를 본 거다. 밀려드는 가책 속에서 순간 푸른 바다에서 멋지게 유영하는 갈치가 떠올랐으나, 흠칫 고개를 저었다. 더는 깊게 들어가면 위험하다. 죄책감이 만성적 자책으로, 그러다 고질적인 열등감으로 확산되는 건 곤란하다.
반성한다. 나는 다양한 측면으로 입체적 반성을 하고 있다. 갈치의 입장, 지구의 입장, 열심히 일해서 갈칫값을 벌어 온 남편의 입장, 그리고 갈치 대신 인스턴트로 채워진 내 위의 입장 등.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