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6 (목) 12:00:00 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
할머니의 삶도 마찬가지로 고단했다. 할머니는 늘 사랑을 얻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던 할아버지는 결국 북한에 두고 온 본부인을 찾아 떠나 버렸다.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던 할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어머니는 단지 ‘보통의 삶’을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정해진 평균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아버지 없이 자란 엄마에게는 ‘평범함’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괴롭힘과 소외됨을 피하기 위해 튀지 않는 삶,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선택한 엄마는 늘 할머니와 거리를 두었고, 심지어 어릴 적 사망한 큰딸의 존재조차 말하지 못하고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살아간다.
결국 어머니가 살아온 삶이 딸 지연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체념과 생존 방식은 딸 지연에게도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지연은 남편의 배신 앞에서도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괜찮은 척하며 도망쳤고, 삶은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감당해야 할 숙제처럼 여겼다. 엄마는 그런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연이 모든 것을 풍족하게 가졌으면서 결혼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고 비난하며 이혼 사실을 세상에 숨기기에 급급하다. 엄마의 외면 속에서 딸 역시 혼자 감당해 온 시간을 엄마에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 안에서만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지만, 가슴 속 상처를 알든 모르든 외면하고 살아간다. 서른두 살의 지연은 지금에도 여전히 세 살, 열일곱 살의 자신을 느낀다. 버려졌다고 믿었던 그 아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위로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성격이나 선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시대와 가족이 남긴 상처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마침내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통해 지연은 깨닫는다. 고통의 끈, 상처의 끈,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던 의지의 끈이 단절되지 않고 자신에게까지 이어져 있음을. 그 모든 삶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며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지연의 단단한 마음을 녹이며, 엄마를 ‘고통을 견뎌온 한 인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갈 용기를 갖게 된다.
천체를 연구하는 그녀는,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이 왜 이토록 길고 고통스러운지 고뇌했다. 하지만 인간이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가 지구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문득 그녀에게 위로를 준다. 비록 밤하늘처럼 어둡고 힘든 역사였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었기에 그들의 밤은 캄캄하지만은 않았음을 느낀다.
이 소설은 네 세대 여성들의 삶을 통해 상처가 어떻게 대물림되는지, 그리고 기억과 공감이 그 상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밝은 밤』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기억하고 끝내 손을 놓지 않는 사랑임을 전하는 작품이다.
<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