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움 / 반숙자 

 

사진집이든 화집이든 무심히 넘겨 보는 버릇이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고 편하게 보는 내 감상법은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는 일도 있겠지만 우선 마음의 공간이 넉넉해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번 사진집도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사진 동호인들이 모여 찍은 사진을 전시하느라 만든 사진집이다. 기성작가보다 아마추어가 많은데 새벽의 대청호반의 풍경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석양이 물드는 한적한 마을 풍경도 정겹게 펼쳐진다. 그런데 화면 전체가 쓰러진 풀들로 꽉 채운 사진 한 장에 눈길이 꽂혔다.

쓰러진 것들은 푸른 벼 포기 같기도 하고 청보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성한 풀 무리 같기도 하다. 아마도 태풍이 쓸고 지나간 흔적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이 사진에 '안타까움'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다. 안타까움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애를 쓰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매우 딱한 생각이 나다"와 "뜻대로 안 되어 마음이 답답하고 죄이다"등 두 가지다. 아마도 작가는 전자의 뜻으로 이런 제목을 붙였으리라.

안타까운 것은 쓰러진 풀들만이 아니다. 요즘 이곳 시골길을 가다 보면 김장 배추가 그대로 있는 밭들이 많다. 김장철은 한참 지났는데도 배추가 그냥 있다는 것은 폐기 처분의 또 다른 의미이다. 배추를 기를 때는 절임 배추를 해서 도시민에게 팔면 적어도 얼마간의 이익은 남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노고도 마다 않고 4개월을 애지중지 키웠을 배추, 바라보는 마음이 아려 오는 것은 그들이 바로 내 친척이고 이웃이라는 데서 동질감을 느껴서다.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니 어떤 분의 글이 겹쳐진다. 그는 요즘 수확을 하고 난 벼 논에 동그랗고 하얀 덩어리들을 보고 공룡 알이라 했다. 볏짚을 둥글게 말아 하얀 비닐로 꽁꽁 동여맨 것으로 정식 이름은 곤포사일리지다. 그는 공룡 알 속에 피폐해져 가는 우리 농촌의 현실을 직시했다. 벼를 수확하고 남은 볏짚은 논에 뿌려 주어야 양분이 되어 내년 농사의 밑거름이 되는데 그것마저 돈으로 환산해야 하는 농가의 비애를 아파했다. 그 비애가 바라만 보는 풍경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현실이라는 데서 공감이 컸다. 각처의 농민들이 수확한 쌀을 크레인에 걸어 군청 앞뜰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수매가를 올리라고 데모를 하고 있다. 추운 날씨에 비닐 천막 안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외쳐 보아야 뾰족한 수가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 그 수필작가는 자신은 공복으로 월급을 받아먹고 살지만 농민들의 암담한 현실을 보고 안타까워서 글을 썼노라 했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간다. 사진은 빛과 순간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그 피사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심상이 우선이다. 남들은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에 마음이 움직이고 사라져 가는 계절의 아쉬움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 작가는 쓰러져 가는 사물에 심상이 멈췄다. 그것이 청보리거나 벼 포기거나 풀이거나 상관없다. 다만 서 있어야 할 것들이 타의에 의해 쓰러진 광경이 이 작가의 심금을 두드렸다는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놀랍기보다는 든든한 것이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이 창작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가.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도 자연스럽게 유로되는 것만큼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아마추어 작가는 유독 쓰러진 것들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내 4,5십대는 마음이 열두 폭 치마보다 넓었다. 새끼를 많이 낳아 뼈만 앙상한 개를 보고도 어미라는 숙명이 안쓰러워 눈물이 그렁하고, 모로 누워 잠든 남편의 흰머리를 보고도 울컥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이웃들 푸념을 들어주다가도 자주 눈시울을 붉혔는데 지금은 바위 가슴이 되어 간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어느 학자는 그것을 공감 능력이 고장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감 능력은 연민, 곧 측은지심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질 仁'이다. 인은 상대방의 느낌을 내 것으로 느끼는 것, 즉 상대와 내가 통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어질지 못하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 것이라면 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겁이 난다. 인자한 할머니가 꿈이었는데 자꾸만 덤덤해지는 이 무심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럼에도 사람들 가슴에는 안타까움이라는 연민이 있어 세상의 설명할 수 없는 아픔들을 치유시킨다. 이것이 창작과 만날 때 상승효과를 가져와 공감대를 확대하며 사람들 마음에 사랑의 피가 돌게 하지 않을까, 나도 거기 덤이 되어 새롭게 변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세상 만물에 어머니 같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한 어느 분의 말씀을 안타까움이라는 사진을 찍은 작가에게 헌사로 주고 싶은 이 아침, 햇살이 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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