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오카리나 / 진서우

 

 

이슥한 밤,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밤은 나를 찾아가기 좋은 날이다. 지키지 못했던 오래된 약속이 불현듯 떠오르고, 내게서 멀어진 사람들이 하나둘 스쳐 간다. 창문을 연다. 한 손은 창에 턱을 괴고 다른 손은 바깥으로 뻗는다. 빗방울은 헤어지려는 애인처럼 내 손바닥 위에 차가운 손을 얹는다.

 

제주 시내에 나갔던 날, 우연히 오카리나 교습소 앞을 지나갔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을 열고 들어가 수강 신청을 했다. 그 후 목요일마다 오카리나를 배우러 다녔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거리지만 새처럼 가볍게 그 길을 오갔다.

 

교습소에 다닌 지 반년쯤 지나자 오카리나에서 제법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나를 상상하는 날이 늘어갔다. 연주 봉사단의 일원으로 양로원과 병원을 순회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불안정한 호흡과 굳은 손가락 때문에 애를 먹었다. 초보 연주자로 만족해야 했다.

 

그즈음 남편과의 관계는 짙은 안개 속이었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그도 사라지고 말 것 같아 마음을 졸였다. 그런 내게, 얼굴을 묻고 실컷 울어도 좋다고 가슴을 내어 준 것이 빗소리였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빗소리는 매혹적인 음악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그때 나는 비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순간 바다가 되어버리는 비가 슬프고 아름다웠다.

 

제주를 왜 사랑하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비가 많이 내려서라고 말할 것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거나 적막한 빗속을 오래도록 걷고 있으면 알 수 없었던 혹은 모른 척했던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 비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화창한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좋았고, 그런 날에는 우비를 입고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한밤중 빗소리에 잠이 깨면 창문을 반 뼘쯤 열어놓고 서서히 잠속으로 돌아갔다. 폭풍우 치는 밤에도 내 그림자를 밟아가며 마을을 걸었고, 돌아올 때는 연민이나 미움, 슬픔을 어둠 속에 두고 왔다.

 

비와 오카리나처럼 잘 어울리는 사이가 또 있을까. 그 둘이 만들어내는 화음 사이를 서성거리면 숨어 있기 좋은 방을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비가 내리는 날, 창가에서 종일 오카리나를 불고 있으면 빗소리는 무대의 풍경으로 둘러서서 환상의 코러스를 넣었다.

 

오카리나에 빠질수록 음악은 나를 흔들었다. 밤늦도록 오카리나 연주곡을 들으며 떠난 적 없는 길을 잃었고, 가보지 못한 길을 되짚어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의 생은 담쟁이 넝쿨처럼 새잎을 내며 뻗어 나갔다. 돌아보면 세상도 그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데 내가 길을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빗줄기가 멈춘 아침, 침대를 빠져나오지 않은 채 익숙한 손길로 음악을 틀었다. 이십 대에 즐겨 듣던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흘러나왔다. 세상 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다는 노랫말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침을 먹고 나자 숲에 가고 싶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말려도 소용없는 걸 아는 그는 나보다 먼저 채비를 마쳤다.

 

비에 젖은 숲은 몽환의 숲이었다.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면 숲이, 나무가, 길이 내 안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을 털어냈고, 그 아래를 지나던 나는 물총 세례를 받은 아이처럼 폴짝거렸다. 살아있음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깊은 숲에 도착하자 오카리나를 꺼내 들고 넓적한 바위에 올랐다. 때죽나무와 산딸나무와 콩짜개덩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초록의 청중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 후 오카리나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숲의 시간이 흐르고 나의 첫 연주회는 끝이 났다. 온 숲이 바람에 몸을 흔들어 와! 하고 소리를 냈다. 그는 후익후익 휘파람을 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세찬 비가 내렸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면 숲에서의 연주회가 떠오른다. 그날 나의 가슴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며 흘렀다. 내가 영혼을 불어넣었던 비와 오카리나, 숲, 바다…. 그들이 꿈결처럼 곁을 지켜 주어서 나는 길을 잃지 않았고, 결국 내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그때 그 숲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그녀를 껴안아 등을 토닥여주겠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해주겠다. 슬픔도 익숙해지니 평안하다고. 쉽게 상처받지 않는 가슴으로 어울려 살아가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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