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유리창 혹은 창틀 그림자 / 이한얼

 

 

어제 새벽 블로그에 짧은 글 하나를 올렸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간추리면 세 가지였다. 지금은 마음이 괜찮은지, 글을 읽는데 괴로웠으니 다른 식으로 써보면 어떨지. 그리고 성실히 써.

 

<달빛과 유리창이거나 혹은 달빛과 창틀 그림자거나>

어떤 글을 쓸 때면 참을 수 없이 슬퍼지기도 한다. 어떤 글을 쓸 때는 기쁨을 주체 못해서 의자를 박차고 엉덩이춤을 추기도 한다. 어느 때는 처음에 즐거웠는데 마침표를 찍으며 울기도 하고, 어느 때는 무거운 마음으로 첫 문장을 시작했지만 쓰고 나니 후련해지기도 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중첩된 여러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일이다. 현재 어떤 마음이든 글 속의 나는 그와 비슷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를 수도 있다. 현실에 영향을 받을 때도 있고 무관할 때도 있다. 매번 다른 사람이라 여겨질 만큼 존재로서의 나는 그때그때마다 그 시간에, 그 공간에서, 그 글을 쓰고 있는 현존재로 거듭난다.

그러니 조증인 듯 기쁨이 흘러넘치는 글을 썼어도 세 시간 후 내가 반드시 즐거운 상태는 아닐 수도 있다. 마음 아픈 글을 썼다고 해서 두 시간 후의 내가 여전히 울고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듯이, 방금 허무하다며 무의미에 대한 글을 썼음에도 한 시간 뒤의 나는 갈릭 디핑 소스에 매운 닭발을 찍어 먹고는 ‘역시 이 맛이지’라며 행복해하는 중일 수도 있다. 이렇듯 한 장의 글이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 어느 날의 글 하나가 나를 온전히 대신할 수도 없다. 나는 수만의 글이 연동하고 융화된 총집합, 낱말과 띄어쓰기가 서로 충돌하고 소멸하는 와중에 연산된 결과값, 예전 글이라는 유리창에 새로운 글이라는 달빛이 드리울 때 생기는 창틀 그림자 같은 존재다. 한 톱니바퀴가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어느 톱니라도 빠지면 움직일 수 없는 기계처럼, 글 하나가 나를 대변할 수 없지만 그 하나마저 나로 수렴하는 생물이다.

그러니 오늘 이 글은 그저 글일 뿐이다. 오늘의 내가 오직 나이듯. 내가 글을 쓰고 글이 나를 구성하지만 글을 곧 나로 치환할 수 없다. 단지 이것을 쓸 당시 너는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구나, 그리 속내를 비춰 볼 수 있는 유리창일 뿐.

 

<달빛과 유리창이거나 혹은 달빛과 창틀 그림자거나>

나는 세상 만물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 건강해라, 힘들면 티 내라, 이런 당연한 조언은 말할 것도 없다. 얼굴이 무슨 일이야, 그게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식사량이냐, 라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조언에도 웃을 수 있다. 심지어 오프숄더가 안 내려가는 끌 팁이든, 매니큐어를 깔끔하게 바르는 요령이든, 나로서는 도통 쓸 일 없는 조언에 대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경청한다. 안 그래도 되는데 시간과 노력을 내게 사용해 준 일이니까.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애써 말을 골라서 전한 선의니까. 그래서 나는 모든 조언이 기쁘다. 듣기 싫은 주제라도, 괜히 찔리는 내용에도, 오해에서 생긴 걱정이어도, 결국은 고맙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듣지 않은 조언은 글에 대해서다. 정확히는 글이라는 삶의 방식과 관련된 모든 성질의 입력. 상대가 선의였든 악의였든, 일부러 했든 모르게 뱉었든 관계없다. 이 부분은 스스로 깨달을 수만 있지, 누군가 강제로 나를 깨울 수는 없다. 물론 있겠지만, 조언이 불러오는 결과가 손해일 때가 많아서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포기했다. 그리 배척했으니 그런 방식으로 누구도 나를 깨울 수 없다. 상대의 다른 말을 듣고 뭔가 깨달을 수는 있다. 또는 누군가의 책을 보며 뭔가 느낄 수도 있다. 허나 먼저 묻지 않은 조언이라면 바로 흘려버린다. 이런 식으로 쓰든 저런 식으로 쓰든, 성실히 쓰든 느슨하게 쓰든, 내게 그것을 정하고 말해줄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오직 나뿐이다.

내가 글에 대해 남에게 바라는 점은 단순하다. “힘내” 혹은 “힘내든가 말든가”하는 응원. “글 좋았어” 혹은 “난 별로던데”라는 감상. 오직 둘 뿐이다. 관심이 없어 응원과 감상을 해주기 싫다는 이에게 내가 달라고 조르지 않는 것처럼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조언마저 수용할 만큼 요령 좋은 사람은 아직 아닌 듯하니.

 

<달빛과 유리창이거나 혹은 달빛과 창틀 그림자거나>

그리고 오늘 글을 쓰던 중에 “이 글이 누군가에게 문제가 되려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하루 만에 벌써 영향을 받았구나.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내 것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글을 쓰고 노출하는 과정에서 지금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구나. 순간 입맛이 썼다. 보이지 않는 굴레가 씌워진 기분이었다. 노력하면 머지않아 다시 벗어던질 수 있겠지. 다만 충분히 털어냈을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무의식에 남아 나를 오랫동안 괴롭힐까 두려움도 들었다.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경계하던 일이었다.

이번 일은 나쁘게 생각하면 생각에 벗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쇠사슬에 감긴 것이다. 반대로 좋게 생각하면 지금껏 마음대로만 해왔던 일에 잠시 경각심을 가져볼 계기일 수도 있다. 한 번 멈춰서 경계하고 점검하는 것만으로 내 자유는 더욱 또렷해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 내게 굴레를 씌웠다 한들 결국 극복할 거라 믿는다. 나는 지금껏 견실하게 쌓아온 내 사고 체계와 자존감을 신뢰하니까. 그러니 괜찮다. 이 역시 달빛으로 삼을 뿐이다.

물론 오늘의 답이 영원불면한 정답일 수는 없겠지. 다만 오늘 내린 차선의 답보다 좋은 답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오직 내일의 나뿐이다. 남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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